응급실에서 간호사에 추근댔던 진상 환자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남자의 얼굴은 잔뜩 술에 취한 것처럼 검붉었다. 가끔 숨도 거칠게 내쉬었지만 술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키는 180cm을 훌쩍 넘었고 체구 역시 거대했지만 배가 많이 나왔다.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카락, 반짝이는 금속테 안경,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명품셔츠와 역시 명품인 하얀색 바지, 순금 특유의 흐릿한 노란 색이 도드라진 굵은 목걸이와 역시 순금일 가능성이 큰 팔찌와 반지에 의료진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와 보호자까지, 응급실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나는 여기 OO과 XXX 과장과 둘도 없는 친구요. 응급실에 다 말했다고 들었는데 연락받았죠? 그대로 해주소!"

응급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절차와 원칙을 무시하고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부류만큼 골치아프고 성가신 존재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처음부터 '최악의 환자'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응급실의 진료는 단순히 도착한 순서에 따라 선착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질환에 해당할 가능성에 따라 진행한다. 또 응급실에서는 모든 환자를 증상에 따라 분류하여 치료할 뿐,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거나 병원의 유력자와 친하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응급실을 찾은 증상을 말하기에 앞서 'OO과 XXX과장과 둘도 없는 친구', 'XXX 과장이 연락한다고 했으니 그 지시대로 하라'고 요구한 남자에게 우리는 막연한 거부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씁쓸하게도 그 거부감은 우리의 과민반응이 아니었다. 혈압, 맥박, 호흡수, 체온 같은 생체징후(vital sign)를 측정하려고 다가간 간호사에게 남자는 '이런 쓸데없는 일은 필요없다'고 짜증냈고, 내가 문진과 이학적 검사(physical examination)를 시행할 때에도 비슷하게 반응했다. 'OO과 XXX 과장의 절친한 친구를 이렇게 대접하느냐?', 'XXX 과장의 지시대로 진행하지 않고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 따위가 왜 참견이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진료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진찰한 결과, 정작 환자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막연한 전신쇠약감이 남자가 호소하는 증상의 전부였고 이학적 검사 대부분은 정상 범위였다. 'OO과 XXX 과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남자가 원한 것은 '비타민 수액과 영양제'였다. 당연히 전신쇠약감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비타민 수액과 영양제를 투여하는 것은 응급실에 해당하는 업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응급실에 해당하는 질환의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니 비타민 수액과 영양제 투여는 'OO과 XXX 과장'의 외래에서 진료하고 처방받으라고 안내했다.

그 말에 남자는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OO과 XXX 과장의 절친한 친구다'는 말을 들먹이며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벌이려는 듯, 발을 쿵쿵였다. 그때 'OO과 XXX 과장'이 도착해서 남자를 말렸다. 남자는 형식적으로 사과했고 어쩔수없이 그날 한 번만 예외적으로 응급실에서 '비타민 수액과 영양제'를 투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비타민 수액과 영양제 투여가 끝나 간호사가 정맥주사를 제거하는 단계에서 드디어 진짜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정맥주사를 연결할 때부터 여성인 간호사에게 나이를 묻고 '남자친구가 있느냐?' 같은 질이 나쁜 질문을 하더니 정맥주사를 제거할 무렵에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면서 '스테이크 한 번 먹지 않겠느냐?', '나이 차이가 있는 남자와 사귀는 것이 어떠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추근거렸다. 그러자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 다가가서 거칠게 항의하며 성희롱으로 처벌받고 싶으냐, 당장 사과하라, 'OO과 XXX 과장'의 친구라고 백번 떠들어도 용납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아쉽게도(?) 실제로 남자를 고발하지는 못했다. 굳이 변명하면 최근의 일이 아니라 7~8년 전 사건이어서 남자가 사과하고 XXX 과장도 응급실을 찾아 사과하며 다시는 비슷한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 다짐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물론 고발을 진행했어도 순조롭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른바 '일반인과 건달의 경계'에 있으면서 건축업, 중고차매매, 대부업 같은 직종으로 돈을 버는 남자는 꽤 부유했고 지역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토호'에 해당해서 중소병원 입장에서는 아주 심각한 사건이 아니면 고발을 진행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2~3년 동안 그런 부분에서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응급실을 방문해서 여성 의료진을 희롱하고 위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일 뿐만 아니라 범죄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응급실에서 일하다보면 의료진, 특히 여성 의료진에 대한 위협과 희롱을 너무 자주 접한다. 그러니 매우 상투적인 문구이지만, 응급실을 방문해서 여성 의료진을 대할 때에는 상대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임일 인식하길 바란다. 아울러 당신도 여성에서 태어난 존재란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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