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 논란.. 의사 vs 이공계

[김용의 헬스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과거에는 고등학교 전교 1등이 대학 진학 시 이공계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는 화공과, 70-80년대는 물리학과, 전자공학과 등이 고교 수석 졸업생들이 선호하던 이른바 ‘인기과’였다. 물론 의과대학에도 매년 고교 최우등생들이 진학했다. 이공계는 의대와 달리 시대 흐름에 따라 선호하는 과가 달라진다. 서울대 전체 수석입학을 물리학과가 수년간 독차지한 적도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중고생들의 장래 희망 가운데 과학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가 지난해 9월 정부의 공공의과대학 확충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SNS에 올린 게시물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러 글 가운데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이 문제가 됐다.

선택 항목은 A) 매년 전교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B)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두 가지였다. 질문 의도는 의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강조해 공공의대 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전교 1등’ 문구가 더 부각되면서 일부 의사들의 엘리트의식, 특권의식을 지적하는 여론의 비판이 거세졌다. 결국 게시 하루 만에 이 글은 삭제됐다.

고교 전교 1등이 대학 이공계로 진학하던 학생들은 이제 ‘소수파’가 됐다. 한 명도 찾아보기 힘든 학교도 많다. 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가 의과대학으로 진로를 바꾸는 행태가 사회문제화 될 정도다. 20년 넘게 이공계 위기론이 나돌면서 이과 최우등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더욱 늘었다.

이공계 위기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결정타였다.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천 명의 연구직이 퇴출됐다. 우수한 ‘과학자 회사원’들이 40대에도 명퇴에 몰렸다. 정부출연연구소의 과학자 정년도 1998년 이전만 해도 책임급의 경우 대학과 같은  65세였지만  IMF  외환위기 경영혁신 조치 이후 61세로 낮아졌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자료를 보면 1997년 기업체 연구인력은 7만5천 명이었으나 외환위기 여파로 다음해에 4천여 명이 연구소를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공계 졸업생들의 직업 안정성은 크게 흔들렸다. 기업들이 경영난의 징후만 보여도 명퇴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우수한 고교 이과 졸업생들은 너도나도 ‘평생 직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과거 의대를 마다하고 이공계를 선택했던 전교 1등 출신 아버지가 자녀에겐 의대뿐 아니라 한의대, 약대 진학을 권유했다. 모두 자격 ‘면허’를 가진 직종으로 개인에 따라 90세까지 일할 수 있는 분야다.

의대와 별도로 의학전문대학원을 만든 것은 다양한 학문배경과 사회경험을 가진 의사를 양성하고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한다는 취지였다. 특히 우수한 의과학자를 육성하자는 목적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학부에서 화학, 생물 등 기초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진료보다는 연구에 몰두해 면역항암제 등을 개발하는데 기여했다. 지금도 연구실에서 밤을 새며 신약 개발에 전념하는 의과학자들이 많다. 진작에 연구 중심의 의과학자들을 육성했더라면 화이자 백신에 뒤지지 않는 코로나19 백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런 의과학자들이 진료 의사들처럼 90세에도 연구실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의대 교수는 65세 정년퇴직 이후에도 병원을 옮겨 진료를 계속할 수 있다. 반면에 이공계는 대학 교수라도 65세 정년 이후에는 연구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대기업 연구소 과학자들은 60세 정년 보장도 되지 않는다. 40세만 넘기면 명퇴를 의식한다. IMF 외환위기 때보다는 근무여건이 훨씬 좋아졌지만 의사처럼 면허를 가진 직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기업에 몸담고 있는 과학자들과 진료보다는 연구에 몰두하는 의과학자들이 70-8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게 과제다.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진료의사처럼 우리 사회가 오래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왜 코로나19 백신을 일찍 못 만드나요?” 이런 질문은 이제 하지 말자. 수십 년간 과학자, 의과학자를 우대하지 않는 문화를 유지하면서 다른 선진국보다 빨리 백신을 개발하라고 독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국내 제약사들은 돈이 많이 들고 불확실한 백신 제조보다는 남의 약을 복제해 파는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

다시 전교 1등이 이공계를 선택하고, 의대생이 진료의사보다 의과학자를 선호하는 날이 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감염병 백신, 면역항암제가 쏟아질 것이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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