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닥터] “임상연구 100개 이끌며 폐암 환자 생명 연장”
⑤연세암병원 종양내과 조병철 교수
“교수님 덕분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연세암병원 폐암센터 진료실. 이소영(가명·45)씨의 젖은 목소리에 조병철 교수(50)의 머릿속에서는 함께 생사를 넘나든 5년 여 동안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이 씨는 40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폐암 진단을 받았다. 표적치료제 이레사를 처방받고 호전되려는 순간, 약에 내성이 생겼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포기했다. 절망의 표정으로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찾아온 환자였다.
조 교수는 이레사 내성 환자에게 투여하는 신약 타그리소의 임상시험에 등록케 해서 무료로 약을 투여했다. 약에 내성이 생길 때마다 또 다른 신약들로 암과 맞서게 했고, 지금은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렉라자와 얀센의 아미반타맙을 병용투여해서 건강을 지키고 있다. 조 교수는 이 씨가 내성이 생겨 격한 기침과 호흡곤란으로 급히 입원해서 사선을 넘나들 때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환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신약임상을 다 해서….”
조병철 교수는 10여 년 전만해도 암 진단을 받으면 5, 6개월을 살기 힘들던 폐암 환자들의 소중한 생명을 다양한 신약으로 연장시키고,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는 의사다. 그는 암 신약에 대한 기초 연구와 임상연구를 연결하는 ‘중개연구’의 세계적 의학자다. 지난 1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조건부 사용허가를 받은 국산 제3세대 폐암 치료제와 얀센의 표적항암제 아미반티납의 개발임상을 주도했고 1000여명의 등록 환자에게 100여 가지 신약의 임상시험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의대 때부터 박수와는 먼 삶을 살았으며, 중심지가 아니라 언저리에서 울퉁불퉁한 길을 해쳐나가며 지금까지 왔다. 종양내과 의사의 숙명으로 환자가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면,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조 교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연세대 생화학과에 입학했다가 졸업 후 복수전공으로 의대에 입학했다. 예과 동아리나 의무관의 추억이 없고, 이를 함께 한 선후배의 지원도 없었다. 의대 입학은 고(故) 허갑범 교수가 의대 학장일 때 의사 자원을 풍요롭게 한다며 만든 제도를 고 백광세 학장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막상 입학하니 자신은 ‘성골(聖骨) 세상’의 육두품이었다. 일부 동기들에겐 굴러온 돌일 따름이었다. 3, 4살 아래의 동기들 가운데 대놓고 따돌리는 이도 있었다. ‘왕따’를 이길 길은 실력뿐이라고 여겨 귀가를 포기하고 대학 독서실에서 밤샘하며 공부해서 상위 5%의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모교에 남는 대신 서울아산병원으로 인턴을 갔다. 그러나 세브란스에서 환영 받지 못한 '이방인'이 아산병원에서 주류가 될 수는 없었다.
인턴을 마치고 세브란스병원 내과 전공의에 지원했다. 아산병원에서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합격을 의심하진 않았는데, 인턴 동기가 불길한 이야기를 전하더니, 헉! 20여 명의 합격자 명단에 ‘조병철’은 없었다. 하늘이 노랗게 느껴지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1년 전 결혼한 만삭의 아내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앞으로 의사를 계속 할 수 있을까 한숨 쉬며 고민하고 있을 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전공의 합격자 1명이 요통 때문에 못하겠다고 한다. 대기 1번인데 올 수 있겠나?”
조 교수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남 탓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은 것은 아닌가? 앞으로는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매사 남에게 양보하기로 다짐했다. 동기가 당직이나 휴일을 바꿔달라고 하면 무조건 응했다. 병원에서 궂은일을 묵묵히 했으며 자신의 몫은 뒤로 미루느라 첫 아이의 출생도 보지 못했다. 기쁨은 밤에 짬이 나면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졌어요. 논문 쓰다가 책상 위에서 고주박잠 자는 것이 편했습니다. 40대까지 한 번이라도 편히 누워서 잔 적이 없어요. ㅎㅎ"
조 교수는 내과 연구부문 우수 전공의상을 받을 정도로 노력을 인정받았지만, 마음속에서 원하던 심장내과에 갈 수 없었다. 전공의 동기들이 양보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손재주도 없고, 두려움이 많아서 심장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위하고 종양내과로 지원했다. 양보와 희생의 삶에서 길이 생겼다. 전임의 1년차 때 보통 전공의들이 하는 차트 정리를 대신 하다가, 표적항암제 이레사에 듣지 않는 환자 기록을 볼 때였다.
“환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울컥울컥했습니다. 어느 날 열흘 만에 승용차를 몰고 귀가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계시처럼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왜 다른 표적항암제를 계속 주면 안 되나….”
조 교수는 환자 22명에게 또 다른 표적항암제 타세바를 처방했다. 특정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들에게서 기적처럼 암세포가 줄어들었다. 이 발견을 담은 논문을 국제학술지 《임상종양학저널(Journal of Clinical Oncology·JCO)》에 보냈더니, 뜻밖에도 곧바로 채택이 됐다. 국내의 무명 의사가 소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논문이 영향력 지수(IF) 30점이 넘는 학술지에 게재된 데다가 세계폐암학회의 폴 번 회장이 직접 논문에 대한 편집자 주를 썼다. 국내 의학계에서 수군거렸다. 도대체 조병철이 누구냐?
조 교수 자신도 그때는 제대로 의미를 몰랐지만, 이 논문은 동일한 원리의 항암제를 연거푸 쓴다는 것은 난센스였던 종양학계에서 ‘표적치료제 순차적 치료법’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도화선이 됐다. 국내 전임의가 《JCO》에 논문을 게재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어서 조 교수는 한국임상암학회 학술상과 고 최흥재 교수를 기린 우현학술상을 연거푸 받았다.
조 교수는 2008년 전임강사로 환자를 직접 보게 됐지만 전체 폐암 환자의 5%를 차지하는 ‘ALK 양성 폐암’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야 했다. 표적항암제 젤코리의 국내 임상시험에서 세브란스병원은 빠져있었기 때문. 의사로서 허탈감,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왜 우리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기적은 의사의 친절과 정성만으로 되지 않으며 반드시 좋은 신약이 있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글로벌 제약사의 개발책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국제학회에 갈 때마다 별도 설명회를 하며 신약을 달라고 애원했다. 일부 교수들은 의대 교수로서의 권위를 버리고 제약사에 고개 숙이는 점에 대해 마뜩찮게 여기는 듯했지만, 환자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애써 무시했다. 그는 세포 차원의 연구를 바탕으로 중개연구를 한다며 약을 받아와서 성과를 내고, 일부 환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연구자 주도 임상’을 통해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조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파시 야니 교수 문하로 연수가려고 하다가, 어렵게 확보한 중개연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싱가포르 국립대 암유전체학 연구소로 떠났다. 2년 동안 2주마다 일요일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귀국, 아침에 샤워하고 곧바로 연구결과를 챙기고 밤에 출국하며 두 나라에서 계속 논문을 발표했다.
2014년 귀국하자마자 노바티스의 자아카디아가 ROS-1 유전자 돌연변이에 잘 듣는다는 임상시험 결과를 《JCO》에 발표했다. 세계 각국 20여 개 기관을 이끌며 시행한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 결과였고, 세계 암치료 가이드라인에 반영됐다.
조 교수는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표적 치료제에 대한 정부 과제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는데, 그 과정을 눈여겨본 유한양행의 남수연 이사(현 지아이이노베이션 대표)가 초청 특강을 요청했다. 강의를 마치니 남 이사가 신약 테스트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LG화학 출신으로 미국으로 가서 제노스코 사를 설립한 고종성 박사가 개발한 약이었다. 조 교수가 싱가포르 연수 가기 전에 고 대표가 전(前)임상실험을 의뢰했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여력이 안 돼 고사했던 약이었다. 조 교수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신약 렉라자의 임상개발을 떠맡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남 이사가 유한양행을 퇴사했다. 옹이에 마디 격으로 경쟁약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가 국내 허가를 받은 데 이어 보험급여도 받았다. 당장 임상시험 환자를 모집하는 것조차 어려워졌고, 유한양행 내부에서조차 “막대한 돈을 써가며 임상시험을 계속해야 하나?”고 수군댔다. 조 교수는 이정희 사장을 만나서 렉라자 개발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사장은 혜안이 있는 경영자였다. 유한양행의 창립정신을 살려 전폭적 지지를 약속했다.
모두들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전임상 결과를 2018년 《임상암연구지(Clinical Cancer Research)》에 발표했고, 그해 추석연휴 때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폐암학회에서 200명을 대상으로 한 1, 2상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학회에서는 한국 제약회사의 신약에 대해서 냉랭했다. 학회가 글로벌 제약사의 막대한 후원을 받기 때문이라고 자위했자만, 타그리소의 동양인 데이터 발표하는 곳보다 작은 방에서 5분 발표하며 속을 삭여야 했다. 그러나 영향력 지수 34점의 《란셋 온콜로지》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와서 논문을 발표하자, 세계 의학자들의 반응도 바뀌었다.
조 교수는 2016년 얀센이 개발한 아미반타맙이 세계 종양학자로부터 외면 받을 때 중개연구를 통해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1상 연구를 통해서 이를 명확히 입증, 《캔서 디스커버리》에 발표했다.
얀센은 조 교수로부터 렉라자의 가능성을 전해 듣고 유한양행을 접촉, 렉라자의 글로벌 판권을 1조4000억 원에 인수했다. 조 교수는 렉라자와 아미반타맙의 병용요법에 대한 국제 임상시험도 주관하고 있다. 20여개 나라 200여 개 병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임상시험 결과가 나오면 폐암 환자들에게 커다란 무기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 교수는 싱가포르 연수에서 돌아왔을 때 연구원들과 함께 경기 광주시 곤지암으로 워크숍을 가서 “1상 연구 10개를 하자”며 손가락을 다 펴고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연세암병원 폐암센터의 김혜련, 홍민희, 임선민, 안병철 교수와 다안암연구실의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원, 임상연구 간호사 등 120여명의 대군이 중개연구, 임상시험 등 100여 개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국내 신약 연구의 메카로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조 교수가 전임의 때 연구원 1명과 함께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닻을 올린 다안(多安)암연구실은 교수 5명, 박사 10명 등 70여 명의 엘리트 과학자들이 폐암 신약을 연구하는 세계적 연구소로 성장했다. 연구실은 종양의 미세 환경 분석하는 플랫폼을 구축했으며 맞춤형 유전자 쥐의 각종 반응을 분석하는 분야에서도 국내 독보적이다. 특히 실험용 쥐에게 암 환자와 거의 같은 종양, 면역세포를 갖게 해서 면역항암제를 실험할 수 있도록 한 ‘면역 아바타’는 면역항암제 개발의 뛰어난 무기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암연구실은 2019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개최된 미국암학회(AACR)에서 전체 신약 18개 가운데 4개에 대한 전임상연구결과 발표하며 세계 학계를 놀라게 했다. 또 국내 벤처기업이 만든 면역항암제 중개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 중국 제약사에 7억9000만 달러에 기술이전토록 해서 지난해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 교수는 2016년 병원에서 폐암 항암 치료의 책임자가 됐지만, 여러 분야의 의사들이 협업하는 다학제 시스템을 밀어붙이다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연세암병원 자문의사였던 세계적 의학자 고 홍완기 박사(전 미국암연구학회 회장)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홍 박사는 영어로 “Fight, Fight, You are doing right thing(싸워라, 싸워라, 너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며 등을 두드려줬다. 홍 박사는 작고 직전에 “나도 어려운 길을 헤쳐 왔다. 나 정도가 되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 너는 앞으로 거물(Big Fish)이 될 것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헤쳐나가라.”
조 교수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며, 그 길을 환자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는다. 매주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건강강좌’를 열고 최신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홍 박사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말한다. “폐암은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되며, 희망을 버려선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