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선동가의 목소리에 끌릴까?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미국 경찰이 DNA 증거를 수사에 활용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며 1990년대에야 보편화했다. 그전까지는 목격자 진술, 용의자 자백, 지문, 혈액형에 크게 의존했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DNA를 사용하여 많은 장기미제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이전에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았던 사건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그런 이유로 1992년 뉴욕의 변호사 두 명이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을 DNA 증거를 통해 구제하는 ‘무죄 프로젝트(innocent project)’란 단체를 설립했다. 단체의 인터넷 사이트(https://innocenceproject.org/)에만 접속해도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은 사례를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무죄가 밝혀진 제이슨 켄드릭(Jaythan Kendrick)은 1994년 70세 노인을 강도 살인한 죄목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25년 동안 복역했다. 그러나 30미터가 넘는 거리의 아파트 3층에서 범행을 목격한 10세 아동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였다. 그럼에도 경찰과 검찰은 제이슨 켄드릭의 인종, 나이, 성별, 직업이 그들이 작성한 용의자 신상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이른바 짜 맞추기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니까 이미 답을 정해두고, 거기에 과정을 끼워 맞춘 셈이다.
이런 문제는 수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할 때도 마찬가지다. 응급실에서 흔히 마주하는 고열 환자만 해도 그 원인은 다양하다. 흔히 ‘몸살’이라 부르는 가벼운 바이러스 감염부터 폐렴, 요로감염, 간담도계 질환, 뇌수막염, 연조직염, 인후염, 지역과 계절에 따라 말라리아와 쓰쓰가무시병까지 매우 많은 질환이 고열을 일으킨다. 그래서 응급실에서는 환자의 증상, 과거력, 이학적 검사(physical exam)를 종합하여 고열의 원인을 좁힌 다음 적절한 진단 검사와 치료를 진행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리 답을 정해두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 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폭염경보가 발령한 여름, 50대 남자가 그늘이 없는 야외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가정하자. 체온이 40도가 넘고 의식이 없으며 환자가 평소 비교적 건강했다면 열사병(heat stroke)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열사병이 아니라 지주막하 출혈 혹은 심한 급성 뇌경색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뇌에서 체온을 조절하는 부분까지 손상하여 고열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또 간농양(hepatic abscess) 같은 질환은 패혈증 쇼크(septic shock)를 일으켜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전까지 환자 자신은 그저 ‘감기 기운이 있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런 다양한 원인을 염두에 두고 신속하게 검사를 진행하여 하나씩 배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섣불리 답을 확신하여 그에 맞추어 검사와 치료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수사와 진료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복잡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 멋지게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길 기대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조심스레 쏟은 노력으로 사건에 대한 정보가 쌓이면 그런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온다. 그러나 그 시기에 다다르기 전에는 조심스럽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말하고, 다양한 결과 가운데 최악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에 끌린다. 그래서 합리적인 판단에 실망한 사이, 몇몇 사람이 달콤한 독약 같은 말로 유혹한다. 그들은 복잡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도 처음부터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거기에 많은 사람이 열광하면 ‘왜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라며 격정적인 선동을 시작한다.
때때로 그런 주장이 어느 정도 들어맞을 때도 있다. 폭염경보가 발령한 여름에 50대 남자가 야외에서 쓰러졌고 고열과 함께 의식 없이 응급실에 도착했다면 정말 열사병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조건 열사병이라며 뇌출혈, 뇌경색, 패혈증 쇼크 같은 문제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그런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그런 태도로 일을 진행하여 환자가 열사병으로 밝혀져도 어디까지나 억세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만약 뇌출혈, 뇌경색, 패혈증 쇼크 같은 문제가 원인이었다면 그런 태도로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지 못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을 비롯하여 요즘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많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멋지게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그럴싸하지만, 현실에서는 난제에 대한 단순명쾌한 답은 대체로 가능하지 않다. 실행과 결과를 염두에 두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니 함께 노력하자는 미적지근한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병통치약 같은 선동에 휩쓸리기 전에 한 번은 이런 부분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선동가의 목소리보다 덜 매력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