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은 왜 증오보다 멋지고 건강한가?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 1447호 (2020-11-16일자)

'국제 관용의 날'... 넓고 깊어 푼푼한 관용의 삶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서로 용서한다. 이것이 자연의 제1법칙이다.” -볼테르(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관용은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인정하는 것” -로버트 그린 잉거솔(미국의 사상가)

오늘(11월 16일)은 ‘국제 관용의 날(International Day for Tolerance)’이랍니다. 유네스코가 마하트마 간디 탄생 125주년을 기념해 제정했고, 국제연합(UN)이 공인했지요. 짝수 해마다 관용과 비폭력 확산에 이바지한 개인이나 단체에 ‘유네스코-마단지트 싱 상’을 수여하는데, 올해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갈등해결센터가 받습니다.

관용은 무엇일까요? 영영사전에서는 ‘Tolerance’을 ‘비록 동의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생각이나 태도가 자신과 달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했더군요. 영한사전에선 ‘Tolerance’가 ①용인, 관용, 아량 ②내성, 저향력 ③허용오차 등으로 풀이됐고요.

관용의 반대말은 불관용입니다. 영어 ‘Intolerance’는 ‘자신의 것과 다른 이념, 믿음, 행동 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됐습니다.

의학용어에서 ‘Tolerance’는 어떤 것을 견뎌내 이기는 힘과 어떤 효과가 더 이상 듣지 않는 것의 두 의미가 있습니다. 뒤의 대표적 예가 약물내성인데 요즘엔 ‘Drug Tolerance’ 대신 ‘Drug Resistance’를 많이 씁니다. ‘불내성(Intolerance)’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인 것이 식품불내성입니다. 유당, 밀가루 등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지요.

우리나라에선 홍세화 씨의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에서 프랑스인의 특징으로 ‘똘레랑스(관용)’가 소개되면서 지식인 사회에서도 한때 유행어가 됐지요. 프랑스가 진정한 관용의 사회인지, 홍세화 씨를 비롯해서 관용을 외친 사람들이 ‘바뀐 세상’에서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관용은 지구촌뿐 아니라 지금 우리사회에서 절실한 듯합니다.

관용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관용의 또 다른 말이 아량이지요. 국어사전에서 ‘너그럽고 깊은 마음씨’로 풀이돼 있습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가 충만한 자신 있는 사람이 관용을 베풀 겁니다. 정신의학적으로 불관용과 미움, 증오는 콤플렉스의 발현일 가능성이 크고요. 두 가지 삶 중에 누가 더 건강할까요? 어느 게 푼푼하고 건강할까요?

관용의 삶이라고 해서 굴종과 비굴한 타협의 삶은 아니라는 것은 오늘 이 날의 거름이 된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떠올리면 명쾌해지지요? 관용은 합리적 정신과 맞닿아있고, 용서와 연결돼 있습니다. 오늘은 관용과 용서의 삶을 시작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가슴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좀 더 꽃 피는 삶, 근사하지 않은가요?


[오늘의 음악]

 

첫 곡은 관용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Manic Street Preachers(미친 거리의 설교자)’의 ‘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이것을 당신이 관용하면, 당신의 아이들이 다음에)’입니다. 관용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서’와 관련된 사랑노래 이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드라마 ‘레만호에 지다’ 주제곡으로도 인기를 끌었죠? 나나 무스꾸리의 ‘Pardonne Moi(나를 용서해줘)’입니다.

  • If You Tolerate This... - Manic Street Preachers  [듣기]
  • Pardonne Moi - 나나 무스꾸리 [듣기]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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