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콜레라 방역, 코로나 방역과 다른 점?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⑪70년대 경제성장기의 보건의료
1960년대 정부와 의료인들이 적극 협력해 보건사업을 부지런히 전개함에 따라 농어촌을 중심으로 보건망이 조금씩 정착되면서 1970년대를 맞았다. 인구 1만 명 정도의 면 단위 보건지소에 결핵, 가족계획, 모자보건 요원을 각 1명씩 배치했다. 급성전염병 발생은 조금씩 줄었는데, 두창(천연두)은 1959년부터, 발진티푸스는 1962년부터 환자가 한 명도 생기지 않았다. 1960~70년대 보건사업은 가족계획, 모자보건, 급성전염병, 결핵, 한센병, 보건망 강화, 농어촌 일차보건의료 등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당시 보건예산은 정부 총재정규모의 1% 수준에 불과해서 이들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의 보건의료정책은 1960년대의 정책을 지속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농촌지역의 지역사회개발이 강조됐다. 의료선교사가 설립 운영한 거제지역사회보건사업을 비롯해, 여러 대학과 병원에서 농어촌 보건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 아래 1970년부터 전개된 새마을운동은 보건의료 환경개선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새마을운동과 연계하여 부엌 개량, 화장실 개선, 마을 목욕탕 신설, 간이상수도 설치 등은 건강향상과 직결됐다. 정부는 마을에 간이목욕탕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장작불을 지펴 더운 물로 목욕을 하게 했고, 대나무를 쪼개어 연결하여서 깨끗한 물을 받아 수돗물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시동을 걸던 순간에도 불결한 환경과 더러운 물은 국민건강의 위협요인이었다. 1970년 여름 경남 창원에서 시작한 콜레라가 전국으로 번져갔고 동해안에서도 창궐했다. 보건사회부는 동해안 어부들이 콜레라에 취약하다고 판단해서 ‘적극적 방역’을 펼쳤다. 강원도 남단 삼척부터 북단 간성까지 해안선을 따라서 항구마다 수백 척의 배가 정박한 상태에서 어부들이 검사를 받았다. 방역 당국이 동해안에서 잡은 물고기를 싣고 대관령을 넘어가려던 트럭을 막고, 생선을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보건사회부 보건과장의 요청으로 연세대 의대 교수와 연구원(예방의학 2명, 미생물학 2명)이 현지에 가서 항구마다 역학조사 와 세균검사를 했다. 필자를 포함한 ‘연세대 팀’은 1주일 동안 매일 8인승 승합차를 타고 삼척에서 간성까지 항구를 돌며 어부들을 점검했다. 배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뱃사공들은 음성 결과를 통보받으면 재빨리 귀가했다.
보건사회부에서는 비상계획관이 현지에 머물렀다. 콜레라 오염이 심각하였기에 보사부와 연세대 팀은 아침 식사는 달걀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로 대신하고, 점심은 굶었으며, 저녁에는 숯불을 피워 식기 소독을 하고 불고기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국립의료원 간호학과 졸업반 30여명이 프로펠러가 달린 경비행기를 타고 강릉에 와서 각종 일을 거들었다.
당시에는 검사 장비와 용품이 충분치 않았다. 강릉도립병원 마당에서는 군용 야전침대를 펴고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그 밑에 배설물을 받을 그릇을 준비했다. 검사를 하는 페트리접시와 배지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필자의 제안으로 접시를 넷으로 가르고 한 군데에 10명씩 검사를 해서 양성이 나오면 다시 한 명씩 검사하였다. 또 창고에 전구를 여러 개 연결하고, 온도계를 여러 군데 걸어놓고 온도를 조종하여 세균배양기(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도록 제안했고, 성공적 기능을 했다.
‘확진 환자’들은 강릉도립병원 마당과 명주초등학교에 격리했다. 환자가 발생한 건물은 출입 금지시키고 방역했다. 강릉시, 명주군, 주문진읍의 모든 초중고교가 2학기 개학을 무기한 연기했다.
종합적인 방역체계를 갖추어 1주일 만에 콜레라 유행을 종식시켰고, 방역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환자가 수용됐던 명주초등학교를 완전 소독하고 보사부의 확인을 거쳐 개교하려고 했지만, 학부모들의 반대 때문에 기존 건물과 강당을 다 허물고 2층으로 재건축했다. 학생들은 강릉초등학교에서 2부제 수업을 받아야 했다.
1970년 국민소득이 200 달러를 넘어섰다. 정부는 1970년대 초부터 ‘1,000불 소득, 100억불 수출’을 목표로 삼았는데, 예상대로 1977년에 이를 달성했다. 1977년 제4차5개년계획이 시작됐는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으로 전환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970년대 초부터 보건의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정부 정책을 입안하는데 보건기획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주학중, 연하청 등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보건경제 영역을 다루도록 했다. 제4차5개년개발계획을 수립할 때에는 사회발전 영역 중 보건의료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1970년대에는 ‘잘 살아보세’슬로건이 달성되면서 가치관이 바뀌고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며 의료수요가 조금씩 증가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는 1977년에 제1종 의료보험(직장의료보험)과 의료보호(현 의료급여)를 전격 실시했다.
그러나 직장의료보험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서 지역의료보험 대상자인 농어촌 및 도시 주민의 의료보험 가입 과제가 정치적 핫이슈로 등장하였다. 또 병원에서 병을 치료받는 국민이 늘면서, 농어촌과 도시 빈민촌이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로 주목을 받았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있는 대학교와 병원에서는 여름방학 때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학생들을 모아 농어촌에 무의촌진료를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또 지역, 학교별로 수많은 의료봉사 동아리들이 생겼다. 학생들은 선배 의료진과 함께 여름, 겨울방학에는 농어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고, 주말에는 도시 빈민들의 건강을 챙겼다.
한편, 1976년에는 15년 동안 우리의 보건의료분야를 꾸준하게 지원해온 미국국제개발처(USAID)가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600만 달러를 우리 정부에 넘겨줬다. 100만 달러는 보건의료 발전을 위한 연구비로 책정하여 10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시행했고, 500만 달러는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인구보건연구원을 거쳐 현 보건사회연구원)을 설립토록 했다. 보건개발연구원은 1976년부터 4년 동안‘마을건강사업’을 3개 시범지역(강원도 홍천군, 경상북도 군위군,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실시했다. 1981년에는 이 세 곳에서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1960~70년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보건의료에 대한 투자는 물론 당시 최악의 전염병인 콜레라를 물리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2020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사례인 듯합니다. 당시 정치지도자와 보건의료 현장을 오가며 오늘날 우리가 혜택받고 있는 현재의 보건정책을 만들어낸 영웅들을 칭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