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베닥] 고위험 임산부에 행복 선물하는 ‘친절 의사’
⑳모체태아의학 서울대병원 박중신 교수
“우린 아기를 가질 수 없나요?” 경기 부천시에서 온 31세 임부 A씨. 임신 소식에 기뻐하다가 유산해서 울먹이는 일이 되풀이됐다. 용하다는 병원을 다녔고 온갖 비법을 다 써봤다고 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다면서 물었다. “지금 뱃속의 아기를 지킬 수 있을까요?”
왜 거듭 유산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뱃속 태아의 빈혈 기록이 머리에 맴돌았다. 진단검사의학과 한규섭 교수와 함께 A씨의 혈액을 검사했더니 헉, 당시까지 한국인에겐 없다고 여겨진 희귀혈액형 바디바바디바 형! 엄마의 항체가 태아의 적혈구를 파괴했던 것이었다. A씨에게 피의 일부 성분을 교체하면서 자궁에 미세바늘을 꽂아 태아의 파괴된 적혈구를 보충하는 수혈을 계속했다. A씨는 그토록 원하던,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박중신 교수(57)는 1998년 교수가 되자마자 자칫 천국으로 떠날 뻔했던, A씨 아기를 살린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1만 여 아기에게 세상의 빛을 선물했다. 그에 대해서 동료의사들에게 “어떤 의사인가요?”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진국!” “의사의 모범!”이라는 대답이 나오고, 환자 커뮤니티에서도 “친절해요,” “자상해요” 칭찬하는 글이 가득하다. 박 교수는 임부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임부를 행복해주게 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지난해 시각장애가 있는 30대 후반의 임부 B씨에게 준 선물은 대표적 예. 박 교수는 B씨가 3D초음파 화면의 태아를 보면서 미소 짓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방법을 찾았다. 초음파에 나타난 태아의 얼굴을 3D프린트로 만들어서 촉각으로 감동을 느끼게 도와준 것. 이 사례는 간호사를 통해서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병원 전체에서 화제가 됐다.
박 교수는 어릴 적부터 산부인과 의사를 숙명으로 여겼다. 부모가 모두 서울대 의대 출신의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병원과 집이 붙어있어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감격의 순간을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 박양실 전 보건사회부(보건복지부) 장관은 아들에게 산부인과 의사가 되기를 드러내고 권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모자(母子)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박 교수가 친절하고 자상하게 환자를 대하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성품’에서 비롯됐을까? 그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서는 의대 오케스트라에서 바순을 불었고 사진반에서도 활동했다. 서울대 의대와 연세대 의대 학생끼리 축구, 야구, 농구, 바둑, 씨름, 육상 등 실력을 겨루는 ‘서·연전’의 응원단에서도 활약했다. 나서는 성격과 거리가 멀지만 ‘누군가 해야 했던’ 응원단장, 사진반장을 맡았다. 본과 2학년 때에는 과대표도 맡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당연히 산부인과 전공의에 지원했다. 그는 전공의 3년차 때 김승욱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석사 논문을 쓰면서 산부인과의 여러 세부전공 가운데 산과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암 환자는 대부분 중년 이후에 발생하지만, 태아의 문제는 삶의 시발점에서 생길 수 있으므로 평생 건강을 좌우하지요. 엄마와 아기의 건강을 함께 책임지는 정말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교수는 전공의를 마치고 산부인과 의사가 거의 필요 없는 군대에서 의무관으로 복무하는 대신, 공중보건의사로 제주의료원에서 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3차 병원이 없는데다가 제주의료원의 전문의는 혼자였다. 어떤 환자가 와도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걸핏하면 야간당직을 서야했고 수시로 하혈하며 실려 오는 응급환자를 봤다.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는 정상 진료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3년 동안 2000여 명의 아기를 출산시켰다. 그는 1997년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서울대병원에 전문의로 복귀하면서 모체태아의학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모체태아의학은 조기진통, 임신중독증, 임신성 당뇨병, 태반조기박리, 태아기형 등 임부나 아기의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에서 엄마와 아기 모두 건강하게 만드는 분야입니다. 임산부와 태아 모두의 몸과 병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지요. 임부나 태아의 병마다 분만의 기준이 다르므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박 교수는 끊임없이 공부해왔다. 처음 전임의를 맡을 때만 해도 조산, 임신중독증에 대해서 예방법과 치료법이 안개 속에 있을 때였다. 세계의 의학자들이 실루엣에 조금씩 색깔을 입혀가고 있으며, 박 교수는 여기에서 핵심 역할을 해왔다. 특히 단백질의 구조와 활동을 분석하는 프로테오믹스 연구를 통해 임부의 덧없는 순간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2002년 이를 위해 미국 하버드대 브리검앤우먼스 병원으로 연수 갔다. 성실하고 사람 좋은 동양인 제자에게 지도교수도 반했다. 스승은 자신이 예일대 의대로 옮기게 되자, 제자에게 동행하자고 졸랐다. 박 교수는 8개월 동안 월요일 오전6시 보스턴의 집에 오는 스승의 차를 타고 뉴헤이븐으로 갔다가 금요일 저녁에 귀가했다. 사제는 예일대 뉴헤이븐병원과 숙소에서 같이 살면서 임신중독증 연구에 파고들었다. 박 교수는 졸지에 미국의 기러기 아빠, 주말 부부가 되었지만, 이때 프로테오믹스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박 교수는 이후 이와 관련해서 논문을 계속 발표해왔고, 2017년 임신 20주 임부의 혈액의 프로테오믹스 분석을 통해 임신중독증 예측 모델을 개발해서 학술지 《프로테오믹스》에 발표했다.
그는 임상치료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2002년 학계에 제시한 ‘쌍태아수혈증후군’ 치료법. 이 증후군은 뱃속 쌍둥이 가운데 한 태아가 태반의 혈관을 통해서 다른 태아의 영양을 빼앗아가는 것. 그대로 두면 큰 아이는 몸이 비대해져서 심장에 부담이 오는 반면, 작은 아기는 영양실조에 빠져 두 태아 모두 위험에 빠진다. 박 교수는 동료 의사들과 고민 끝에 서구에서 시험적으로 시도되고 있던 수술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다. 자궁 안에 내시경을 삽입해서 태반의 혈관을 레이저로 응고시키는 치료에 성공해서 국내 학계에 모델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기발한 치료법을 추구하기 보다는, 근거 중심의 의학을 체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의사다.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은 세계로부터 인정받아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 출판사에서 발간한 《임신중독증》 교과서의 ‘임신중독증 병인과 치료’ 부분, 미국 엘시비어 출판사에서 펴낸 《산과 마취학》 교과서의 ‘산전 태아 평가 및 치료’ 분야, 윌리블랙웰 사에서 출판한 《근거 기반 산부인과학》의 ‘태아수종’ 단원을 집필했다.
그는 또 혼자서 열심히 환자를 보는 것을 넘어, 교육을 통해 더 많은 의사가 이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여긴다.
“제자들에게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가 되라고 당부하지요. 의사는 실력이나 성의가 없으면 환자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또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라고 강조합니다. 환자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피로해도 최선의 진료를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가 서울대병원 교육연구부장, 서울대 의대 교무부학장, 대한의학회 수련교육이사와 고시이사 등을 역임했고 지난주 한국의학교육학회 부회장을 맡은 것도 이 같은 교육 철학을 전체 의사로 확대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진료, 연구, 교육의 세 박자에 최선을 다하느라 1997년 제주도에서 올라와서 전임의로 재직한 이후에 최근까지 23년 동안 단 한 번도 평일에 집에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외부 행사가 줄어들면서 이것이 깨졌지만.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