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 병원 건립해 이사하니 이런 일이…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⑥신촌시대 연 세브란스병원
1962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연세캠퍼스에 새 병원을 건립하여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을 이전했다. 원래 세브란스병원은 1885년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설립됐다가 을지로를 거쳐 1904년 남대문 밖 서울역 앞 도동(복숭아골)에 세워져서 그때까지 유지됐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배경인 ‘돌담병원’ 정도 규모였다.
새 건물은 미국 CMB(China Medical Board·중국의료이사회)의 재정지원을 받아 미국인이 설계해 건축했는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다. CMB는 록펠러재단 소속재단(subsidiary)으로 중국에 의료지원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과 타이완을 지원하였다.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다가 중국이 공산화되자 한국에 온 이안 스튜어트 로브 교수(마취과)는 큰 해머를 어깨에 메고 현장에서 열심히 감독했다. 1962년에 준공된 건물이 지금까지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 세브란스병원은 당시 미국의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는데, 사무처는 의과대학 맞은 편 1층에 칸막이가 전혀 없는 커다란 홀에 있었다. 당시 이런 미국식의 사무실 형태는 1962년에 건립된 유한양행 대방동 사옥과 아울러 2개 뿐 이었다. 사무실 입구 옆에는 커다란 자가발전기가 있었는데, 수술하다가 전기가 끊어지면 자동적으로 가동돼 금방 전기를 생산, 공급했다.
이 건물에는 당시로서는 희귀했던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는데, 안내원이 30분씩 교대로 근무하며 엘리베이터를 조종했다. 간호사와 간호대학생의 기숙사에는 세탁기가 있었고, 교수실과 사무실에는 방마다 세면대가 설치됐다. 전압이 고르지 않아서 기기와 기자재 고장이 잦았기에 중요한 기기에는 변압기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병원을 운영하는데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병원 경영자를 괴롭혔다. 수세식 화장실은 계속 막히고, 화장실의 휴지는 새로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금방 없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신기하다 보니까 환자나 보호자들이 불필요하게 오르내리곤 하였다. 엘리베이터는 항상 만원이었기에 전기료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여러 선교 단체의 재정지원으로 병원에 가족계획클리닉과 모자보건센터가 들어섰다. 기독교세계봉사회에서 전국의 기독병원에 결핵약품을 무상 공급했는데, 그 중 하나로 미8군에서 지어준 결핵병동에 결핵센터가 설치되었다.
서울 선교부에서는 의과대학을 위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는데, 의학도서관에서 각종 외국 학술지를 구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의대 교수들도 연세대 의대 도서관에 오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예방의학교실에는 가족계획사업을 재정 지원하는 자금으로 도입한 IBM 천공기(puncher), 검공기(verifier), 분류기(sorter) 등이 있었다.
대규모 병원을 운영하려니까 전문경영인이 필요하였다. 1955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산부인과 수련을 받은 홍준식 전임강사가 미국인 자문관들의 통역을 담당했는데, 이들이 병원행정 전문인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홍준식을 추천했다.
홍준식은 피츠버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병원행정을 전공해 보건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고, 32세에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병원행정을 공부한 홍준식은 1965년에 다시 도미하여 버진아이랜드 의료보험국장을 거쳐서 뉴욕에서 병원 부원장으로 근무하였고, 가정의학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여 일하다가 가톨릭메디칼센터 원장에 올랐다. 미국 연방정부, 뉴욕 주정부와 뉴욕 시는 홍준식 정년퇴임일인 1월 7일을 홍준식의 날(John Hong Day)로 정했다.
1950년대엔 서울에 노동조합이 3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세브란스노동조합이었다. 1962년 병원이 이사하자 건물은 크고, 교통이 불편하여 환자는 적을 때라서 청소를 비롯해서 할 일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1964년에 노동조합원들이 파업을 했고, 교직원 부인을 중심으로 자원봉사자들이 청소와 행정 등을 대신 해서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