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염이라는 전쟁터에서 의사는 어떤 존재?
[한광협의 간보는 사람의 간편한 세상]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4명의 아들 중 3명이 전사한 어머니의 마지막 남은 아들을 구출하는 미 육군 레인저스 부대의 이야기다. 구출 팀은 8명 가운데 6명이 전투 중 생명을 잃는 필사적 과정을 통해 라이언을 구해 어머니에게 돌려보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는 제2차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 북서부에서 독일군에 포위당한 연합군 병력 34만명을 극적으로 탈출시킨 ‘다이나모 작전’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해군은 민간 선박을 대거 동원해 작전을 드라마틱하게 성공시킨다.
이들 전쟁 영화의 감동은 생사가 갈리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생명을 구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있다. 의료 현장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전쟁터와 같고, 의료진은 영화 속의 구조 팀에 해당한다. 의료진이 얼마나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구조하는지에 따라서 환자의 생사가 결정된다.
간염은 간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戰線)이다. 간에서 급격히 전투가 벌어졌다가 끝나면 급성간염, 전투가 6개월 이상 오래 지속되면 만성간염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 간질환이 발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 술도 안 마시는데?”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임상적으로 간염은 바이러스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다섯 가지 간염 바이러스가 밝혀졌고 A와 E형은 급성 간염만, B, C, D형은 급성과 만성 둘 다 일으킨다.
필자가 30여년 동안 가장 많이 본 환자는 만성B형간염이다. B형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대부분 태어날 때 어머니로부터 감염돼 오랫동안 간에 은신해 있다가 성인이 될 즈음 전쟁을 일으킨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간세포가 장기간 공격당하면 오랜 시가전에서 도시가 폐허로 되듯이 간이 서서히 망가져 간경변이나 간암으로 진행되고 결국 환자의 목숨을 빼앗는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사망원인 1위가 간질환인 이유는 B형간염 때문이다.
과거에는 효과적 치료제가 없어서 병이 악화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이었지만, 1980년대 후반에 인터페론 치료제의 등장으로 환자를 구조할 수 있게 됐다. 1990년도 후반에 개발돼 국내 도입된, 먹는 항바이러스제(Lamivudine)는 영화 ‘덩케르크’에서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구하는 민간 구조선과도 같았다. 이미 간염이 지나치게 악화된 환자에게는 구조의 손길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것과 같지만, 수많은 많은 B형간염 환자가 이 약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적의 신약이 출현해 B형간염과의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또다른 시련이 등장했다. 이 약에 대해 내성을 갖는 바이러스가 나타나면서 B형간염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새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얼마 지나서 내성에 잘 듣는 후속 약이 개발되었다는 낭보들이 잇따라 들려왔다.
필자의 환자 가운데 B형간염 치료제가 국내에 출시됐을 때 이미 간경변이 진행돼 간이식을 받았던 50대 환자가 있었다. 환자는 어렵게 조카의 간을 기증받아 간이식을 받고 약을 복용하며 건강을 회복하던 중에 치료제에 내성이 생겨 B형 간염이 재발됐고 상태가 점점 악화됐다.
당시엔 국내에서 내성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필자는 주치의로서 여러 방도로 알아보고 환자와 함께 홍콩으로 가서 신약을 구해 다행히 간염을 조절할 수 있었다. 지금도 20년 넘게 진료실을 찾아오는 그 환자를 보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일병을 구출한 팀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구조 작전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이없이 환자를 잃더라도, 낙담해서 구조 작전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의사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