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 환자, 왜 심평원을 겨냥하나?
면역 항암제 오프 라벨 처방이 사실상 병원 현장에서 중단돼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환자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와 만났다. 하지만 입장차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심평원은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했고 이를 환자들이 대체적으로 수긍했다고 평가한 반면, 환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에 제대로 귀 기울이기는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실 이번 대화의 자리는 29일 지방 각지에서 올라온 30여 명의 말기 암 환자 및 가족이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심평원 서울 사무소 앞에서 오프 라벨 처방 금지 철회를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하던 중 전격 성사된 자리였다. 서로의 입장과 처한 상황을 놓고 얘기하고 해결 방법을 찾자는 취지로 심평원 측이 제안해 성사됐다.
약제관리실 관계자를 만나러 가는 와중에 대표 몇 명만 참여하길 원하는 심평원 측과 환자와 가족 전원이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환자 측과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지만, 결국 30여 명의 환자와 가족들 모두가 심평원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소통을 기대하며 작게나마 희망을 안고 24층 약제급여실 대회의실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는 예상 소요 시간인 30분을 훌쩍 넘겨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어떤 대화 오갔나
환자들은 면역 항암제 처방 가능이라는 대전제 아래 ▲심평원 압력 행사로 인한 처방 금지 사태 해결 ▲오프 라벨 투약 대책 발표 ▲환자 요구 시 처방 후 보고 명문화 ▲표준 항암제와 면역 항암제 병행 시 표준 항암제 급여 처리 ▲모든 심사 절차 간소화 및 신속 처리 등을 요구했다.
또 이 모든 사항을 명문화한 공문을 통해 모든 병원에서 기존 투여 환자의 투약 중단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을 촉구했다.
반면 환자들과 만난 이병일 약제관리실장은 환자들의 이런 요구 사항을 청취하고 여러 검토를 약속하면서도 심평원이 환자들의 모든 민원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실장은 "오프라벨 처방과 관련된 시행 규칙과 허가 초과 절차 방법은 엄밀히 따지면 복지부 장관 고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떻게 하겠다고 해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한계가 있다는 점을 환자들에게 설명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2008년부터 230개 요법이 허가 초과로 관리되고 있고 다른 암 환자도 그 절차를 통해서 진료를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진료는 형평성 있게 운영돼야 함을 설명했다"며 "전체적인 틀은 심평원이 바꿀 수 없다. 심평원은 권한이 없지만 면역 항암제에 대한 환자들의 요구 사항이 많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검토를 해서 상급 기관에 건의를 하겠다는 점도 말씀 드렸다"고 전했다.
다만, 심평원은 현재 기존 환자의 오프 라벨 처방이 가능할 수 있도록 2차례에 걸쳐 전국 71개 다학제위원회에 연락을 해 놓은 상태다. 또 30일 열리는 면역 항암제 전문가 자문 회의에서도 전문가들을 상대로 기존 환자에 대한 처방이 가능하도록 의견을 전달할 예정이다.
아울러 오프 라벨 처방 진행 사항을 환자들과 지속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심평원과 환자 간의 핫라인 개설과 예외적인 이유로 투약이 중단된 환자 2명에 대해서는 대면 상담을 진행하고 병원 측에 연락을 해 투약 중단 상유를 파악, 조치할 것을 약속했다.
"수긍하는 분위기" vs. "원론적인 답변만"
한 자리에서 공통된 주제로 대화를 장시간 나눴음에도 대화 후 양측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졌다.
심평원 측은 대화가 무리없이 진행됐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환자들과 대화 직후 기자들과 만난 이병일 실장과 심평원 관계자는 "대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심평원의 현재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했고 오프 라벨 처방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다"며 "대화에 참여한 환자분들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자들은 얘기는 달랐다. 요구 사항이 관철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는 주장이다.
이날 대화에 참여한 면역 항암 카페 운영자 김태준 씨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말을 중간에 끊고 대부분의 요구 사항은 심평원이 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있었다"며 "일단 우리 환자들의 의견을 다 제시했고, 심평원의 입장을 들어본 수준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또 김 씨는 "심평원은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며 "정책 결정은 복지부가, 오프 라벨 처방 중단 사태는 심평원이 아닌 병원과 의사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등 복지부동의 자세만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없었다" vs. "있었다"
심평원과 환자들은 심평원의 병원 압력 행사에 대해서도 여전히 상반된 입장차를 보였다.
먼저 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병원 압력설에 심평원은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이병일 실장은 "비급여 처방에 대해서는 심평원에 청구가 되지 않기 때문이 병원을 알 수 없다. 더욱이 병원과 청구된 급여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병원에 압력을 행사할 수조차 없다"고 해명했다. 이 실장은 "오히려 의사들이 하지도 않은 심평원의 압력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오프 라벨 처방을 근거 없이 오남용해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약제관리실 관계자가 오프 라벨 처방과 관련, 병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이 발견될 경우 관련자를 문책 하겠다"며 오프 라벨 처방을 거부하고 있는 병원 명단을 주면 직원들이 즉시 확인해 처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반면 환자들은 심평원 관계자들의 생각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심평원의 압력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프 라벨 처방을 중단한 병원 명단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태준 씨는 "심평원에서는 자꾸 오남용 처방 얘기를 하는데 오남용할 환자는 없다고 생각된다. 몇 백만 원씩하는 비급여 항암제를 일부러 처방받을 환자는 없다. 의사들이 꼬신다고 해도 할 환자들도 없을 것"이라며 "의사 오남용 처방을 들킬까봐 병원이 오프 라벨 처방을 중단했다는 이병일 실장의 말은 억측도 그런 억측이 없다. 상당히 잘못된 시각이다. 오프 라벨 처방으로 살아나고 있는 환자들이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그는 "많은 말기 암 환자들이 면역 항암제 처방을 받고 살아나고 있는데 이것을 막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반문하며 "분명 심평원이 병원에 압력을 행사했고, 이런 정황이 담긴 녹취록도 공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프 라벨 처방 중단 병원 명단과 관련해서도 "병원과 심평원과의 관계를 아는 이상 잘못한 병원 적어 내듯이 낼 수는 없다"며 "명단 제출 후 어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공개 할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끝없는 평행선, 죽음 내몰리는 환자
심평원과 대화를 마친 후 말기 암 환자들은 울분을 토했다. 이번 사태는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고도 환자들의 의견을 무시한 결과라며, 심평원의 직무유기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심평원과의 대화도 더이상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오프 라벨 처방 고시 관련 사전 의견 제출 기간에 환자들과 보호자 입장에서 문제가 될 부분에 대한 의견을 냈는데도 무시하고 강행했다는 것이다.
김태준 씨는 "심평원은 환자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들어야 하는데 계속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다"며 "문제가 발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행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고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오프 라벨 처방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이 지지부진한 사이 하루하루가 시급한 말기 암 환자들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로 면역 항암제 처방을 받지 못하면서 그동안 치료 효과가 있었던 환자들 사이에서 효과가 반감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만약 사태가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면 환자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될 것이다. 말기 암 환자들은 당장 오프 라벨 처방 받는 것 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면서 "만약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돼 사망까지 이르는 환자가 발생한다면 상당한 파장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책임을 묻도록 할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청와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