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최강국으로 ‘뉴잉글랜드 필그림’의 정신
청교도 필그림의 땅, 뉴잉글랜드
이재태의 종 이야기 – 57. 청교도 필그림의 땅, 뉴잉글랜드
다양한 복장을 한 이 통통한 여성 인형들은 영국의 식민지 시대에서 18세기까지 미국 북동부 버몬트Vermont 주에서 살던 여성들의 모습을 조각한 종이다. 두꺼운 석고를 깎아 형상화한 뒤 고온에 구은 묵직한 초크웨어(chalkware) 조각품이라 한다.
이 종을 만든 마샤 캐리(Martha Carey)는 뉴욕에서 패션 회화를 공부한 후, 1968년 고향인 버몬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족들이 살던 작은 도시에서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이름을 딴 부조(浮彫)회사를 설립하고 각 시대를 대표하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여성들의 모습을 조각하여 팔았다. 그녀는 1970년대 후반, 사진에서 보는 ‘버몬트의 부인Ladies of Vermont’이라는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의복의 변천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정장 외출복 차림의 석고 여성 인형 종 6개를 소개하였다. 이 종들이 미국의 종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끌었기에, 동 시대의 버몬트 어린이를 모델로 한 귀여운 여아들의 모습을 한 6개의 종(Children of Vermont, Little Missy Bells)도 만들어졌다. 18세기 이전에는 집안에 난방이 불충분하였으므로 버몬트의 혹독한 겨울을 이기기 위하여, 여성들은 내부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두텁고 통통한 치마에 스카프 차림을 하고 있다. 각각 높이 20cm, 무게 4-700gm 정도이고, 당시 한 개에 20불에 판매되었다.
(식민지에서 19세기의 복장을 한 버몬트의 부인 종. 마샤 캐리 작품, 1970년대)
‘뉴잉글랜드’는 미국 북동부의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메인, 뉴햄프셔 6개 주가 위치한 지역을 말한다. 해안에 인접한 구릉성 산지 지형이 대부분이고 북쪽으로 캐나다, 서쪽으로 뉴욕 주와 인접하고 있다. 여기는 농지가 부족하고 농업에 적절하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섬유와 금속공업이 발달하였다.
이민 초창기의 미국 뉴잉글랜드 농가는 대가족이 통나무집에서 살았다. 대부분을 차지하던 잉글랜드계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는 낮았다. 이들은 종교와 사회적 지위와 비슷한 주변 사람들과 중매결혼을 하였다. 이 시대 여성들의 정체성은 결혼 후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남편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여성은 가족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고, 정치 참여도 허락되지 않았다. 아들이 결혼하면 아버지가 땅, 가축 또는 농기구를 선물했고, 딸은 가구, 농장의 동물 또는 현금을 받았다. 18세기의 보고서를 보면, 여성은 보통 20대 초에 결혼하여, 6명에서 8명의 아이들을 낳았고 아이들 대부분은 성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초기 이민자 농가의 여성들은 양털실을 뽑아 스웨터와 스타킹을 뜨개질하였으니, 사진의 의복 대부분은 자기들의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초와 비누를 만들고, 직접 짠 우유로 버터를 만드는 등, 가정에 필요한 물자들을 자급자족하였다고 한다.
(좌. 미국 북동부의 뉴잉글랜드 지역, 우. 최고의 임상의학잡지 NEJM의 로고)
의학 전공자들에게는 ‘뉴잉글랜드’가 전통과 자부심을 지닌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임상 의학자는 일생에 한번이라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NEJM)’이라는 의학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매주 발행되는 이 저널은 1812년 1월 미국 보스턴에서 두 명의 의사가 주도하여 창간하였다. 1921년 매사추세츠 의학협회가 판권을 구입하고, 1928년부터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여 발행하고 있다. 이 저널은 ‘투고되는 논문은 다른 곳에 게재되거나 발표된 적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잉겔핑거 법칙)을 세계 최초로 공표하여 유명해졌다. 여기에 게재된 논문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인용지수(2015년 기준 51.4)는 최고의 과학저널인 네이처나 사이언스보다 더 높다.
(좌. 필그림들의 메이플라워호 항해, 버나드 그리블 그림, 우. 존 윈스럽의 초상화)
흔히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들을 순례자를 의미하는 필그림(Pilgrim)이라 부른다. 1820년 대니얼 웹스터가 미국 정착 2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이들을 ‘필그림’이라 부른 이래, 뉴잉글랜드에 이주해 살던 애국 시민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 뜻 그대로 뉴잉글랜드는 종교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이주해 온 경건한 청교도 이주자들이 많이 모여 영국의 농업식민지를 개척한 곳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저력은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문학, 철학과 교육 변화 운동에서 출발되었고, 미국에서 산업 혁명으로 가장 먼저 변화된 지역도 이곳이다. 독립운동도 뉴잉글랜드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노예 해방 운동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었다. 당연히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이후 이곳은 미연방공화국의 중심이 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가 높았고, 일찍부터 교육 제도가 발달한 덕분에 미국 정신문화의 발달을 주도한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중산층들은 개척자 정신, 경건한 신앙심, 기업가 정신이 강하고 애국심도 높고, 대체적으로는 보수 성향을 띄고 있다. 주민들의 정치적 참여도도 높다.
이 지역의 초기 이민자들은 그들이 바라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육에 집중하였다. 이민 초창기부터 매사추세추 식민지에서는 동네에 50 가족이 정착하면 초등학교를 설립하였고, 100 가족 이상의 거주지에는 고등학교를 설치하도록 했다. 지금도 명문 사립 기숙학교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상류층 거주 지역에는 일찍부터 대학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민이 정착한지 6년 뒤인 1636년에 건립된 보스턴의 하버드대학(Harvard), 그리고 1701년 설립된 예일(Yale)대학 등을 중심으로 목사, 변호사, 공무원들이 양성되었다. 청교도들이 지향하던 시대적 요청과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유능한 인재의 배출이 목적이었다. 초기에는 의학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영국으로 가야했다.
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학인 브라운, 콜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하버드, 프린스턴, 펜실바니아, 예일을 아이비리그(Ivy League)대학이라 한다. 월등한 학문적 업적, 탄탄한 재정, 우수한 교수진과 학생들이 갖추어진 세계 최고의 대학들이다. 예일, 브라운, 하버드, 다트머스대학이 뉴잉글랜드에 있고, 다른 대학들도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1940년대에 담쟁이 넝쿨이 덮힌 학교건물이 있던 이 대학들이 정기적으로 미식축구 시합을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미식축구팀이 없던 최고의 공과대학 MIT는 아이비리그에 속하지 않는다. 훌륭한 뉴잉글랜드의 교육제도는 롱펠로, 소로,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등의 문학가와 사상가, 정치인, 그리고 많은 사회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좌. 1636년 개교한 하버드 대학, 우. 보스턴의 미식축구 뉴잉글랜드 페트이오트 팀 로고)
유럽인들은 15세기 말부터 북미 대륙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식민지 미국’은 1620년 102명의 영국 청교도(Puritan)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떠나서 미국 북동부에 플리머스 식민지를 형성하며 출발된다. 1629년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하자, 의회를 기반으로 활동해 오던 청교도들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축소된다. 영국 국교회의 청교도 탄압이 점차 증대되고, 유럽의 30년 전쟁으로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던 이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더욱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온건파 청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영국을 탈출할 결심을 한다. 캠브리지대학 출신의 귀족 존 윈스럽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왕으로부터 북미대륙에 식민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특별허가장을 받고, 이민을 위한 매사추세츠만 회사를 설립한다. 마침내 1630년 4월 이 회사 선박 4척이 영국 사우스햄프턴 항을 떠났고, 6월에 미국 세일럼(Salem)에 도달하였다. 한 달 후에는 다시 7척의 배가 떠나는 등 그 해에만 약 2천명이 매사추세츠의 새 터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배타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10여년 뒤 이곳의 인구는 약 2만명이 되었고, 더 나은 주거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으로 퍼져나가 일곱 개의 정착촌이 건설된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인 샤우무트 정착촌은 후일 영국 도시 이름을 딴 보스턴으로 바꾸면서 매사추세츠의 중심 항구도시로 발전되었다.
정착지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매사추세츠 식민회사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률과 규정들을 제정해서 행정 및 사법적인 공동체제를 도입하였다. 식민지 뉴잉글랜드는 영국으로 부터 독립될 때까지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종교행사 뿐만 아니라 마을의 정치와 집회의 공간이 되었다. 지도자들은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사랑으로 묶여진 종교적 공동체이며, 여기에서는 기쁨과 슬픔, 노동과 고통을 모두가 함께하자고 했다. 이들은 가토릭이나 성공회의 중앙집중식 교회 체제보다는 체제와 신앙생활 규범 및 일상 규칙을 신자들 상호간의 계약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조직과 일, 성직자, 장로, 집사 등의 선출을 구성원들에 의해 결정되는 ‘회중會衆교회’가 조직된 것이다. 윈쓰럽의 식민지 정부는 교회와 서로 협조하며 행정체제를 만들어갔다. 식민지 정부는 자유인 신분에게 만 재산소유권을 인정하였고, 재산소유권자만 교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자유인이 되려면 교회의 정회원이어야 했고, 비로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교회가 신앙 및 세속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신분제도와 재산권은 하나님이 정해 준 질서라고 믿었고, 신분에 따른 격차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부와 사회적 지위에 있던 상류계층은 이곳에 와서도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서민들은 식민지의 토지가 평등하게 분양되어야 한다고 했으나, 상류층은 효율적인 토지 이용을 위하여 투자 능력에 따라 차등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류층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1인당 약 200에이커의 땅을 분양받았으나, 서민들은 30 에이커 이하를 받았다.
이주지에서는 청교도 남성들만이 식민회사의 독점적인 주주가 되었고, 참정권을 얻었다.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매사추세츠식민지에서 쫒겨나 다른 식민지로 가야만 했다. 당시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 지역에도 식민지가 들어섰는데, 영국의 제임스왕은 이 지역을 통 털어 새로운 영국이란 뜻의 ‘뉴잉글랜드’라 명명한 것이다. 이후 126년 동안에는 이 지역에서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이 영국과 대항한 4차례의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있었는데, 결국 영국이 승리하자 뉴잉글랜드는 공식적인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버몬트의 소녀 종 Little Missy Bells. 마샤 캐리, 1970년대)
이민자들이 늘어나며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행정교역 중심지인 보스턴은 인근의 소규모 식민지와 연합한 뉴잉글랜드 자치 동맹의 중심이 되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에는 오랫동안 영국 정부에 의한 직접적인 통제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었다. 1773년 미국에는 13개 주의 영국 식민지에 2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 왕을 섬기는 국민이기는 하나, 영국에 종속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예혁명 후 영국은 해외 식민지를 간섭하며, 1691년 매사추세츠를 청교도 자치식민지에서 왕의 직속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점차 식민지 탄압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영국이 독점적으로 식민지로 수출하던 상품의 가격을 올렸다. 18세기 들어서서 영국이 스페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의 전비 충당을 위하여 ‘설탕법’, ‘인지세법’등을 만들어 식민지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다. 이에 식민지 의회는 영국의회에 대의원을 보내지 못하는 자신들에 대한 ‘무대표 무과세’를 근거로 세법들의 폐지를 주장했다. 1773년 미국인들이 마시는 차에도 세금이 부과되고, 마침내 영국군이 소요 주민들에게 발포하여 5명이 숨지자 ‘보스턴 차 사건Tea Party’이 발생한다. 사무엘 아담스가 지휘하는 50명의 결사대가 보스턴 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 선박에 인디언으로 위장하고 접근해서 선적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진 것이다.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군대를 보내어 강력하게 억압하였다. 군대의 주둔 경비도 모두 주민들에게 떠 넘겼다. 1774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13개 식민지대표의 대륙회의가 개최된다. 이듬해 영국과의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식민지 군은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다. 결국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이 패배하며 전쟁은 끝이 났다. 영국과 미국은 1783년 베르사유에서 평화 조약을 맺고,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세계 최초로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종교적 자유를 찾아 나섰던 청교도들이 건설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세계 최강국이 된 나라의 기둥이 되었던 필그림의 행로를 생각해 본다. 말없는 다수가 세상을 밝히고자 촛불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2016년 12월 어느 주말 밤 대한민국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