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칼럼] 느끼한 세상...김치찌개에 소주나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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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곽재구의 ‘김치찌개 평화론’에서>
김치찌개는 대한민국 국민음식이다. 직장인들의 ‘국민찌개’이다. 점심엔 김치찌개에 밥 한 공기로 마음에 점을 찍고, 저녁엔 얼큰한 김치찌개 안주로 술잔을 기울인다. 김치찌개는 대한민국 한식당의 감초메뉴이다. 한식당차림표에 김치찌개가 없다면, 그 집은 장사 안하기로 작정했다고 봐야 된다. 아니다. 김치찌개 하나 제대로 요리할 줄 모른다면, 다른 음식은 보나마나 뻔하다.
술꾼들은 술집 안주메뉴판에 김치찌개가 없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 집이든 김치찌개 정도야 슬쩍 주인에게 부탁하면 금세 자글자글 끓여내 온다. 김치찌개 요리는 라면 끓이기만큼이나 쉽다. 레시피도 간단하다. 김치, 돼지고기, 두부 정도에 다진 마늘, 풋고추, 고춧가루, 소금 등만 있으면 누구나 기본 맛을 낼 수 있다.
돼지고기 대신 멸치나 꽁치 고등어 참치 어묵 햄 소시지를 넣어도 된다. 소금 대신 액젓 새우젓을 쓰기도 한다. 당면이나 소시지 혹은 라면 사리를 넣어 끓여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다. 식당에 따라, 주방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다르다. 방방곡곡 집집마다 어머니 김치에 따라 그 맛이 독특하다. ‘국민요리’라는 별명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김치찌개의 주인공은 역시 김치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김치찌개도 영 그렇다. 김치찌개엔 묵은지가 기본이다. 묵은지는 최소 1년은 넘어야 그 이름값을 할 수 있다. 옛날엔 3년 묵은지도 흔했다.
묵은지는 김장할 때 아예 따로 담는다. 배추를 쉽게 삭게 하는 젓갈이나 무채 등 다른 양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속이 꽉 찬 배추보다는 푸른 겉잎이 많은 배추를 쓴다. 천일염도 듬뿍 뿌린다. 오래 묵힐 것일수록 더 많이 넣는다. 김칫독은 시원한 대숲이나 뒤란 응달에 묻고, 그 위에 볏짚으로 거푸집을 해준다.
요즘 일반식당의 김치찌개는 ‘묵은지 공장에서 강제로 익힌 것을 사다가 쓰는 게’ 보통이다. 김치가 같으니 김치찌개 맛도 비슷하다. 국물도 사골육수나 멸치육수를 쓰지 않고 맹물이나 고작 뜨물을 쓴다. 깊은 맛이 날 리 없다. 김치공장에선 오랜 시간 발효시켜 묵은지를 만들지 않는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제숙성’시킬 수밖에 없다. 마냥 시간을 기다리다가는 생산비용을 맞출 수 없다. 그렇다고 자그마한 밥집에서 1년 넘는 묵은지를 담가쓰기엔 비용이 너무 크다. 해마다 묵은지를 담그는 일이 어디 보통일인가.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내로라하는 김치찌개 전문식당에서는 나름대로 묵은지를 차별화 시키려 애쓴다. 김치공장과 계약을 하거나 시골에서 묵은지를 공급받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하지만 전문식당에서조차 보통 서너 달 숙성시킨 ‘익은 지’를 쓴다. 묵은지와 익은 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묵은지는 깊은 맛이 나고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익은 지는 너무 익으면 시어터지거나 쓴 맛이 난다.
서울서소문 중앙일보 건너편 장호왕곱창의 양은냄비 김치찌개는 오묘한 신맛으로 인근 젊은 직장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80년 문을 열 때는 곱창이 주 메뉴였던 것이 언젠가부터 김치찌개가 주가 돼 버렸다. 1977년 개업한 광화문집은 칼칼한 맛으로 발길을 끈다. 허름한 탁자와 주방 그리고 2층으로 통하는 삐걱 목조계단도 그대로이다. 술꾼들은 비 오는 날 곧잘 2층 우묵 방에서 계란말이 안주로 좌판을 벌인다. 40년 가까운 역사의 마포도화동 굴다리식당 김치찌개는 들큰하다. 큰 솥에다가 김치찌개를 끓여놓은 뒤 그 솥에서 손님에게 그 때 그 때 퍼준다. 김치찜 원조로 유명한 서대문 한옥집 김치찌개도 찜 못지않게 이름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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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돼지고기이다. 돼지고기는 목살이나 앞다리 살 혹은 삼겹살을 쓴다. 정육점을 하다가 김치찌개가 주업이 된 식당도 곧잘 눈에 띈다. 식당이름도 ‘정육점’이라고 붙어있다. 서울 강남청담동 현대정육식당이나 뚝섬 성일정육점 등이 그렇다. 김치찌개에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을지로 4가 방산시장 은주정은 낮엔 김치찌개만 팔고, 밤엔 삼겹살만 판다. 삼겹살을 구워 먹다보면 김치찌개가 무료로 곁들여 나온다.
김치찌개는 ‘엄청 센 불에 눈 깜빡할 새 끓여내야’ 맛있다. 약한 불로 오래 끓이면 칼칼한 맛이 사라진다. 묵은지는 원래 담백하다. 짭짤하지만 시지 않다. 익은지가 오래되면 시어터진다. 김치가 너무 시면 생김치를 약간 섞으면 된다. 양은냄비에 신 김치를 넣어 끓이면 김치의 산(酸)성분 때문에 냄비의 알루미늄성분이 녹아든다. 뚝배기나 스테인리스냄비가 낫다.
요즘 배추가 금값이다. 상추로 삼겹살을 싸먹는 게 아니라, ‘삼겹살로 상추를 싸 먹는다’는 우스개말까지 나왔다. 김치는 아예 ‘금치’를 넘어 ‘다이아치’란다. 배추김치 추가 주문 땐 2000원씩 더 받는 식당도 있다. 큰일 났다. 김치찌개가 귀족찌개가 될 판이다. ‘다이아찌개’가 되게 생겼다.
생김치는 오래 끓이면 잎이 오그라지고 흐물흐물해진다. 원래 맛이 사라진다. 익은 지나 묵은지는 웬만큼 끓여도 사각거리는 맛이 남아있다. 씹는 맛이 좋다. 칼칼하고 개운한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사람도 그렇다. 묵은지 같은 사람이 으뜸이다. ‘억지로 익힌 공장 묵은지’ 같은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싱싱하고 맵고 짜고
조금은 달콤한 생김치를 두고는
시어빠진 김치를
쭉쭉 찢어먹는 나를 웃으십시오
나는 아직도 저렇듯
겉절이에서 속잎 하나까지
고루 발효하여
부드럽게 시어지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감싸며
어깨 기대며
한 세월을 푹 삭으면
나도 세상맛이 나겠습니까
-<김영천의 ‘묵은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