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칼럼] 한국밥맛은 왜 일본보다 못할까
묵은쌀로 하루 전쯤 지어 스텐그릇에 담긴 ‘푸석푸석 식당밥’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 ‘꽃밥’ 전문>
“밥!” 가만히 되뇌어본다. 참 살갑다. 부드럽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다소곳이 모아지는 소리. 두 손 모아 공손하게 받아들이는 ‘ㅂ’소리. 금세 따스한 기운이 온 몸에 차르르! 차오른다.
점심에 식당밥을 사먹는다. 밥알에 풀기라곤 하나도 없다. 푸석푸석하다. 보나마나 묵은쌀로 지은 것이다. 하나같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이다. 밥뚜껑을 열면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언제 지은 밥일까. 보온밥솥의 마른 ‘쇠 냄새’가 역하다.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황지우 ‘거룩한 식사’에서>
도대체 밖에서 사먹는 밥은 왜 맛이 없을까. 호텔뷔페, 고급한식집, 시골식당 어디가나 똑같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반찬가짓수가 많으면 뭐하나. 정작 밥은 전기밥솥, 압력밥솥에서 ‘울고 있던 밥’이다. 매가리 하나도 없는 ‘쇠그릇 밥’이다. “와장창!” 주방설거지 쇠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끔찍하다.
밥은 이미 천덕꾸러기다. 반찬이 주인이다. 한마디로 ‘밥맛이 영 병~맛’이다. 안남미 밥이 이랬을까. 영락없는 옛날 통일벼 쌀밥이다. 도무지 찰기가 없다. 밥알이 입안에서 질척인다. 질긴 밥풀때기가 따로 없다. 자꾸만 잇바디에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는다.
언젠가부터 ‘집밥’이 사라지고 있다. 식당 밥이나 비슷해졌다. 때맞춰 밥 짓는 가정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하기야 전기밥솥 ‘쿠!쿠!’가 알아서 해주는데 무슨 걱정이랴!
지극한 맛은 원래 맛이 없다(至味無味). 담담하다. 밥맛이 그렇다.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조선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죽어서도 밥이 있는 제사상을 받는다. 밥은 한식의 처음이요 끝이다. 기본이다. 밥은 생명이다. 하늘이다.
추운 겨울밤, 아랫목 사각 꽃 보자기에 덮인 아버지의 밥그릇을 떠올린다. 하얀 사기그릇이 미어질 듯한 고봉밥. 다문다문 풋콩이 박힌 눈부신 햅쌀밥, 뚜껑을 열면 김이 무럭무럭 기름 자르르 하던 밥. “햐아! 잘 먹었다!” 아버지는 걸쭉하게 트림을 하며 소 웃음을 웃곤 했다.
‘맛있는 밥의 조건은 대체로 이렇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고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 냄새를 맡았을 때 구수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입 안에 넣었을 때는 밥알이 낱낱이 살아있음이 느껴지고, 혀로 밥알을 감았을 때 침이 고이면서 단맛이 더해지며, 살짝 씹을 때는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게 이 사이에서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켜야 한다.’
-<황교익의 ‘미각의 제국’에서>
밥맛(Eating Quality)은 누가 뭐래도 가을철 추수 직후 밥맛이 으뜸이다. 햅쌀로 지은 밥이 살로 간다. 뜸이 잘 든 햅쌀밥은 밥만 먹어도 맛있다. 속이 든든해 배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하얀 사기그릇에 김이 펄펄 나는 하얀 고봉밥. 조상들은 바로 그 ‘밥 심’ 하나로 5천년 역사를 이어왔다.
왜 햅쌀밥은 맛이 있을까? 쌀은 찧고 나서 7일이 지나면 산화가, 15일이 지나면 맛과 영양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결국 정미하고 나서 15일 이내가 맛 영양이 가장 우수하다. 그뿐인가. 쌀은 수분함량이 16%일 때 그 맛이 최고다. 햅쌀처럼 갓 수확해 도정했을 때가 바로 수분함량 16%이다. 또 있다. 농사의 ‘農(농)’은 별 ‘辰(신)’ 자에 노래 ‘曲(곡)’자가 합쳐진 말이다. 벼는 ‘별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다. 햅쌀은 가장 많이 ‘별의 노래’를 간직하고 있다. 우주의 기운을 가장 많이 머금고 있다.
한국 쌀은 도정(깎기)이 문제다. 도정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 쌀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쌀의 가장 바깥쪽 왕겨만 살짝 벗겨낸 게 1분도 현미다. 그래서 현미밥은 대부분 영양소가 살아있다. 하지만 거칠어 소화가 잘 안된다. 우리가 많이 먹는 흰 쌀밥은 현미의 바깥쪽 껍질을 대부분 깎아낸 10분도 쌀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분이 줄어들어 쌀이 쉽게 깨지거나 금이 간다는 것이다. 또한 쌀 영양소의 60∽70%가 들어있는 쌀눈까지도 일부 제거된다.
백미상태에서 흠이 없는 쌀이 완전미(完全米)이다. 쌀이 원래 생긴 그대로의 모양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현미만큼은 아니지만 영양분도 적지 않게 남아있고 밥 색깔도 옥양목처럼 탐스러운 하얀 색이다. 이런 쌀은 빛이 나고 맑다.
시중 싸전에서 사는 국산쌀은 완전미 비율이 겨우 80%를 넘는다. 깨진 쌀, 금이 간 쌀, 낟알이 하얗거나 까만 점이 박혀있는 쌀, 상처가 남아있는 쌀, 변질된 쌀, 부러진 쌀, 싸라기, 토막 쌀, 덜 익은 쌀, 쌀눈(배아)이 원래 크기로 붙어 있지 않은 쌀이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20%에 이른다. 미국산 캘로스쌀 99.75%나 일본쌀 90% 이상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흠이 간 쌀은 맛이 없다. 깨진 과일이 맛없는 거나 똑 같다. 옆구리 터진 쌀로 지은 밥은 역시 맛도 옆구리가 터진다. 쌀이 깨져 있거나 금이 가 있으면 그 틈으로 전분과 냄새가 빠져 나와 밥이 질척해지고 모양이 흐트러진다. 식혜처럼 푸석푸석해진다. 밥알 모양이 쉽게 흐트러진다. 바그르르하고 찰기가 없다.
한마디로 흠이 간 쌀로 밥을 지으면 질척질척한 ‘밥풀’이 된다. 꼬들꼬들한 ‘밥알’의 완전미하고 질적으로 다르다. 완전미 밥알은 하나하나가 입안에서 살아서 뛰논다. 잇몸과 이빨 사이를 탱글탱글 넘나든다. 토막쌀로 지은 밥풀은 입안 아무데고 달라붙는다. 젖은 낙엽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질긴 밥풀때기다.
오늘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기인의 ‘밥풀’에서>
식당 밥은 너나없이 밥알에 풀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아침에 미리 담아놓은 밥이다. 더구나 대부분 묵은 쌀로 지은 밥이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꾹꾹 눌러 담은 밥. 밥그릇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밥뚜껑에 소름이 돋은, 맥 빠진 물방울들. 사람들은 그 밥을 아무 생각 없이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김빠진 밥, 풀 죽은 밥, 찰기라곤 하나도 없는 밥. 그런 밥이 몸속에 들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섬 지역 식당에 가면 더한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해산물은 더없이 싱싱한데, 정작 기본인 밥맛이 못 따라간다. 예로부터 쌀이 귀해서 일까. 하지만 요즘은 섬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쌀을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밥 짓기에 습관적으로 무심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한식의 주인은 밥이다. 반찬은 밥을 살려주는 조연일 뿐이다.
잘 여문 벼가 쌀알도 좋다. 밥을 지으면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벼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클수록 잘 여문다. 벼가 영양을 덜 소모하기 때문이다. 수확하는 타이밍도 중요하다. 이삭이 100% 누렇게 될 때보다 이삭에 약간 파릇한 기운이 있을 때 거둔 것이 맛이 있다.
벼는 이삭이 맺히고 수확하기까지 약 두 달이 중요하다. 이 때 주는 거름이 이삭거름이다. 대부분 질소비료를 뿌려준다. 이삭거름은 쌀 수확량을 늘리려고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삭거름을 너무 늦게 주거나 많이 주면 벼가 웃자라 쌀 맛이 없다. 쌀알에 단백질 함량이 많아진다. 쌀에 단백질 함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밥이 딱딱해지고 찰기와 질감이 떨어진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질소비료를 거의 3배나 준다. 한국산 쌀의 단백질 함유량은 6~11%로 차이가 많다. 밥맛이 좋으려면 적어도 6.5%이하가 돼야 한다.
쌀은 햅쌀일수록 구수하고 차지다. 기름이 자르르하다. 오래되면 묵은내가 난다. 구수한 맛이 사라진다. 햅쌀은 늦가을 한철이다. 귀하다. 그렇다면 ‘갓 도정한 쌀’이 으뜸이다.
일본에 가면 어딜 가나 밥맛이 좋다. 하다못해 간이음식점 밥이나 편의점도시락 밥맛도 한국의 웬만한 식당밥보다 낫다. 쌀이 한국보다 좋아서 그럴까. 아니면 밥 짓는 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본 대도시에선 즉석도정전문점이 곳곳에 있다. 최대한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 것이다. 일본식당이나 가정에선 손님들이 들이닥칠 시간이나 가족들의 귀가 시간에 맞춰서 밥을 짓는다. 갓 지은 밥이 맛있는 거야 두말 할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