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의 종교전쟁과 뮤직박스

●이재태의 종 이야기

관현악단 '오케스트라'는 '춤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오케스타이'에서 유래하였다. 유럽의 중세까지도 악기 연주자들에 대한 인식은 높지 않았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궁정이나, 축제, 결혼식, 장례식을 떠돌았던 떠돌이 악사들은 안정된 주거를 원하였다. 이들은 점차 권력과 재력을 지닌 궁정의 악사가 된다. 경제적인 지원과 신분을 보장받았으나, 영주나 귀족들이 원하는 음악을 제공하여야 했다. 산업혁명으로 상공업이 발달하자 오케스트라의 후원자는 정치 종교적 권력에서 상업적 권력으로 옮겨갔다. 부를 쌓은 부르주아들이 음악회나 무도회와 같은 그들이 동경하던 귀족들의 생활을 따라하려고 노력한다. 궁정의 악사들도 바깥으로 나와 연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연주 장소도 폐쇄된 궁정의 거실에서 벗어나 넓은 무대와 야외로 옮겨갔다. 이때부터는 서민들도 직접 연주되는 생음악을 즐길 수 있었고,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들도 늘어갔다. 점차 그들의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음악에 맞추어 춤도 추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은 악단을 부를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18세기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기계 산업은 이러한 욕구를 부분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기기를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길이가 다른 빗 모양의 강철판을 음계 순으로 달고, 회전하는 실린더에 부착된 바늘이 태엽의 힘으로 회전하면서 소리를 내도록 하는 뮤직박스(music box)이다. 공연자 없이 음악을 제공할 수 있고 하프나 핸드벨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까지도 재현해 낸 것이다. 일본에서는 네덜란드어로 수동식 오르간을 오르겔(orgel)이라 불렀기에 여기에서 유래한 오르골이라 하며, 한자로는 자명금(自鳴琴)이라 불리어진다.

위그노의 종교전쟁과 뮤직박스

(일본 산교의 뮤직박스. 태엽을 감으면 음악과 함께 종을 든 소녀가 빙빙 돌며 춤을 춘다.)

뮤직박스는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교회의 시계탑에서 유래하였다. 시계 장인(匠人)들은 시계탑에서 종소리를 자동으로 내는 방법으로 음악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1796년 스위스의 안톤 파브르(A. Favre)가 뮤직박스를 처음 만들었다. 태엽을 감아 원통을 돌리면 가시가 촘촘하게 붙은 빗이 원통(실린더)에 붙을 때 바늘이 금속판을 튕겨서 공명하는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담배케이스, 콤팩트, 인형상자 등에 장치되었으나, 1820년경부터는 상자에 넣은 지금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원통형 뮤직박스는 핀이 부딪치는 가시를 달리하면 여러 곡을 연주할 수 있어서 가정용 악기로 인기를 모았다.

(나비와 꽃이 장식된 3개의 종이 있는 원통형 마호가니 뮤직박스. 스위스)

1880년 경 원반의 돌기가 강철 빗살을 튕기는 방식인 원반(디스크) 형태의 뮤직박스가 고안되었다. 독일 칼리오페와 심포니온사의 원반형 뮤직박스는 쉽고 저렴하게 많은 곡을 추가할 수 있는 최고의 뮤직박스였다. 특히 빗에 종(bell)을 더하였고, 손잡이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켬으로서 종소리를 다양하게 조절 할 수 있었다. 독일의 폴리폰, 그라마폰, 미국의 레지나사가 명품의 원반형 뮤직박스를 제조하였다. 원반의 크기는 점차 확대되었고, 24인치 원반은 약 2분 정도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으므로 가정에도 많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1877년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하고, 전쟁과 경제위기로 세상이 변화하자 점차 인기를 잃어갔다.

오늘날에는 뮤직박스가 달콤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탁상위의 장식품이나 장난감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직도 아기자기한 뮤직박스를 찾는 사람들이 많고, 스위스 후즈(Reuge), 일본 산교(Sankyo), 중국의 윤셍 등이 대표적인 생산회사들이다. 나는 위의 사진처럼 태엽을 감아 작동시키면 원통과 원반에 새겨진 음악과 함께 종소리가 연주되는 뮤직박스들을 수집하였다. 한 세기 전,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들은 뮤직박스의 멜로디를 음미하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칼리오페(KALLIOPE)사의 4개의 종이 있는 원반(디스크)형 뮤직박스. 독일)

오늘날의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가 군사 및 경제적 강국으로 자리하게 된 데는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개신교도들인 위그노의 역할이 컸다. 특히 발전이 뒤져있던 내륙도시 베를린을 부강하게 만든 주역들은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망명한 3만여 명의 위그노들이었다. 18세기 초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 인구의 ⅓은 프랑스에서 온 위그노들이었는데, 이들은 경건한 청교도 정신으로 독일의 기업가 정신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중세이후 계속 대립해오던 독일의 성장에 프랑스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나, 그 바탕에는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이 있다.

유럽의 나라들이 근대 국민국가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톨릭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인간성 해방을 주창한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지게 된다.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자, 부패한 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점차 커졌다. 가톨릭 교회를 인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혁신하여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기운이 싹튼 것이다. 르네상스가 예술적이고 귀족적인 운동이라면, 종교개혁은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를 혁신하여 민중의 생각과 정치, 경제, 사회 체제 모두를 변화시켰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1483-1546, 독일)와 장 칼뱅(1509-64, 프랑스)

성서에 바탕을 둔 신앙이나 윤리적인 쇄신을 주창한 선구자들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종교개혁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수도승 마틴 루터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발점은 교회의 면죄부 판매였다. 이 무렵, 교황청과 가톨릭교회는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사제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당신들의 돈이 이 상자에 들어가는 순간,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 나온다”라고 설교를 하였다. 루터는 마인츠교회의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교회 재정을 위해 판매하던 면죄부에 대해 신학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대학의 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의견서’를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루터는 교회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독점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누구나 예수의 이름하에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이 만든 형식이나 권위는 구원과 무관하며, 오직 도덕적 회개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진리는 사제들의 권위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사람들은 이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므로,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에 집착한 교황청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종교개혁 운동의 열기는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갔다. 프랑스에서는 장로교회를 창설한 복음주의 신학자 칼뱅(Jean Calvin)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혁주의 신앙을 열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종교 개혁에 참여한 프로테스탄트의 대부분은 칼뱅파였다. 종교개혁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까지의 시기의 프랑스 내 칼뱅파 개신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 친구, 동맹자, 서약을 지키는 자)라 한다. 그들 대부분은 섬유방직 기술과 같은 첨단기술을 가진 상공인들이었다. 1562년 당시 파리에 1,200개의 위그노 교회들이 있었고 칼뱅파 신도 2백만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쳐 전 유럽에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수많은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성 바르톨로메우스 축일의 위그노 대학살 사건 삽화, 1572년 8월 24일, 출처 위키피디아)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가의 앙리 2세 사후 즉위한 아들 샤를 9세가 죽자, 또 다른 아들인 앙리 3세가 즉위했다. 앙리 2세의 부인인 피렌체 출신의 카테리나 메디치(1519-89)왕후는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였다. 가톨릭인 그녀는 위그노인 나바르(프랑스 남부지방)의 왕 앙리를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공주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 결혼으로 서로 대립하던 구교와 위그노를 화합시키고, 왕권 위에 군림하던 구교도 귀족 기즈 가문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기즈 공작을 사랑하고 있던 공주는, 미남도 아니었던 위그노 앙리와의 결혼을 싫어했다. 앙리는 이 결혼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귀족들도 무마시켜야 했다. 그러나 위그노로 키워졌던 그는 언젠가는 신교의 자유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결심은 지켰다고 한다. 결혼식을 위한 화합의 축제가 벌어지던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우스 축일 밤에, 기즈 공작은 앙리의 핵심 후원자인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제독을 살해했다. 그는 핵심 위그노 몇 명 정도를 죽여 위세를 뽐내려고 했으나, 일단 유혈이 낭자해지자 흥분한 구교도들이 신교도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3천여 명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수만 명의 위그노가 학살당하게 된다. 결혼식은 엉망이 되었고, 앙리도 체포되어 4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후 앙리는 아내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옥하여, 위그노의 수장이 되어 구교 세력에 본격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위그노들이 구교도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전쟁 상태가 된다. 탄압이 심해지자 거의 40만 명의 위그노들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영국, 미국 등지로 탈출한다. 그 결과, 프랑스에는 1500명 이하의 위그노들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사건의 주역인 기즈 공작은 앙리 3세에게 죽었고, 앙리 3세도 광적인 수도사에게 암살당한다.

나바르의 왕 앙리는 어부지리로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어 부르봉 왕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인 파리 귀족들은 왕이 된 앙리 4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는 큰 혼란에 빠져든다. 앙리 4세가 1593년 "파리는 종교를 바꾸어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가톨릭으로의 개종하자, 비로소 귀족들이 안도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30년 이상(1562-98) 지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낭트 칙령을 발표한다. 허용한 곳에서의 신앙의 자유와 재산상속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을 엄벌하며, 이를 밀고한 자에게 위그노들이 낸 벌금과 몰수재산의 1/4를 준다는 내용을 삭제한 것이다. 그는 마르그리트와 이혼을 한 후, 피폐해진 나라의 복구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국민들은 그를 위대한 ‘앙리대왕’이라 칭송하였으나, 그 역시 열혈 구교도에게 암살되고 만다.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를 인정한 앙리 4세, 1553-1610)

다시 위그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앙리 4세의 증손자 태양왕 루이 14세(1636-1715)는 가톨릭의 중흥을 위하여 낭트 칙령을 무효화하고 위그노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하였다. 수많은 위그노들이 다시 학살당하였다. 위그노 목사는 무조건 죽였고, 남자는 평생 거룻배의 노 젓는 일을 시켰는데, 노 한 개의 무게가 무려 130kg이었다. 여자는 종신형에 처했고, 어린아이들은 수도원으로 보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또 다시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떠났다. 박해는 시민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1798년까지 계속되었다. 200여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 인구 1700만 중 약 400만이 고국을 떠났다. 첨단 산업의 기술자였던 위그노들의 망명은 프랑스의 산업 기반을 붕괴시켰다. 반면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들은 증기기관과 면방직 공업을 발전시키며 영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하였다. 독일, 스위스로 간 위그노들은 중화학과 정밀 기계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그노에 의한 스위스 시계산업의 발전은 뮤직박스의 발명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다.

목숨을 바쳐가며 종교의 자유를 지키려했던 위그노의 행적은 세상을 바꾸었다. 강건하고 신실한 위그노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근면하고 부강한 도시로 변화시켰다. 21세기의 독일은 유럽연합의 최강국이 되었고, 스위스의 발전된 금융산업과 제약산업도 위그노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하였다. 대량살상의 시대 21세기에도 망명의 길을 떠나야하는 종교전쟁의 희생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다. 뮤직박스에서 울려나오는 평화의 멜로디에 숨어있는 위그노들의 희생과 열정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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