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칼럼] 들밥과 도시락

[김화성 칼럼] 들밥과 도시락

논두렁 구불텅해도 들밥광주리는 머리에 잘도 이고 오시네!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 막히고 맥 빠진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앉을 자리 정한 뒤에

점심 그릇 열어놓고 보리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채운 뒤에

맑은 바람 배부르니 낮잠이 맛있구나

농부야 근심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농가월령가 ‘6월령’에서>

밥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자나 호랑이에겐 토끼나 사슴이 밥이다. 토끼나 사슴의 밥은 풀이다. 풀은 물 햇볕 바람을 먹고 자란다. 사람의 주된 밥은 쌀보리 등을 익힌 곡식이다. 하지만 밥은 누가 먹는 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귀신이 먹는 밥은 ‘메’이고, 임금이 먹는 밥은 ‘수라’이다. 양반이나 윗사람이 먹는 밥은 ‘진지’이다. 종이나 하인이 먹는 밥은 뭘까? 그것은 ‘입시’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먹는 밥도 다르다. 저녁밥을 먹고 한참 뒤에 먹는 밥은 밤참이다. 아침과 점심사이에 먹는 것은 아침참, 저녁을 전후에서 먹는 것이 저녁참이다. 새참이나 곁두리는 일을 하면서 끼니 외에 틈틈이 먹는 밥이다. 한밥은 끼니가 아닌 때에 차린 밥이다.

들일 하다가 들에서 먹는 밥은 모두 들밥이다. 들밥엔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두렁에 앉아 먹는 기승밥이 있다. 모내기를 하다가 먹는 못밥도 들밥이다.

한여름 농사일은 입에서 단내가 난다. 땅에선 이글이글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온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한다. 배 속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난다. 점점 배가 등가죽에 붙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구부러진다. 괭이나 삽이 천근만근 무겁다. 이때 먼 곳 논두렁을 타고 들밥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아낙네가 보인다. 갑자기 괭이질이 빨라진다. 호미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들밥은 맛있다. 고슬고슬 기름이 자르르하다. 고들고들한 고두밥(된밥)이나 질 게 된 진밥 또는 설게 된 선밥이 없다. 막 지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쇠 솥밥이다. 보통 집에서 먹는 밥은 가족끼리 두레상에 둘러앉아 먹는다. 집안 맨 위 어르신이 먼저 ‘숟가락을 국이나 찌개에 한번 적신 뒤(술적심)’ 비로소 아랫사람들은 수저를 든다. 어르신 밥은 솥에서 맨 처음 푼 숫밥이다.

들밥엔 된장찌개 갈치찌개 등이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국은 거의 없다. 국까지 끓이기엔 그 바쁜 농번기에 시간과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아낙네들이 대광주리에 국그릇까지 챙겨 머리에 이고 올 여력도 없다. 들일은 아무리 적어도 여남이나 많게는 스무 명이 넘는다. 국그릇만 챙기려 해도 남정네가 지게로 옮겨야한다. 들밥에 남정네까지 동원하려면 품삯이 아깝다. 들밥은 어디까지나 아낙네의 몫인 것이다.

아낙네들은 수건으로 똬리를 틀어 머리에 얹고, 그 무거운 광주리를 인다. 그러고도 구불구불 논두렁길을 잘도 간다. 묘기대행진, 아니 생활의 달인이다! 논두렁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똑바로 치고, 논둑은 울퉁불퉁해도 새참광주리는 똑바로 이고 걷는다. 아낙네의 이마와 얼굴엔 금세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다. 보통 들밥운반은 두서너 번은 왔다 갔다 해야 끝난다.

들밥은 강다짐이다. 강다짐은 국이나 물에 말아먹지 않고 반찬과 먹는 밥이다. 들밥 반찬은 소박하다. 열무김치, 물김치, 콩나물무침, 취나물, 마늘쫑 무침, 더덕 도라지무침, 무생채, 겉절이, 고구마줄기 무침, 시금치, 애호박무침, 깻잎, 호박잎, 콩잎에 된장 청국장찌개 등이다. 거의 ‘풀’이다. 육류는 기껏해야 꽁치 고등어구이다. 들밥찌개는 큰 냄비나 양푼에 풍덩하게 끓여, 그걸 각자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밥은 같은 솥에서 푼 한솥밥이다. 처음부터 그릇에 담아오지 않고, 빈 그릇만 가져와 그곳에서 푼다. 모두들 그릇 위까지 수북하게 올라오는 고봉밥(감투밥)이다. 꽁보리밥(곱삶)은 아니지만, 보리가 반쯤 섞였다.

두레꾼들은 배가 터지도록(한밥) 밥을 먹는다. 고추장 상추쌈에 볼이 미어터진다. 서로 눈을 흘기며 실쭉하게 웃는다. 막걸리도 금세 동이 난다. “꿀럭~꿀럭~” 목울대 넘어가는 소리, “캬아~” 입 맛 다시는 소리가 낭자하다. “끄윽~” 걸쭉한 트림소리가 양념으로 추임새를 넣는다. 따라온 누렁이도 ‘된장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뭔가 더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신다.

광주리에 담긴 향기로운 보리밥이며

아욱국 달디 달아 숟갈에 매끄럽게 흐르네

어른 젊은이 차례로 둘러앉아

왁자지껄 밥 먹는 소리 요란하다

달게 포식하매 속이 든든하니

배를 북처럼 두드리고 그저 흡족해 할뿐

-<강희맹의 금양잡록 ‘배를 두드리며’에서>

요즘 들밥은 도시락이다. 북한에선 곽밥이다. 서울 시내에도 도시락전문집은 많다. 점심 때 도시락 하나 사들고 가까운 고궁에서 까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산이나 인왕산, 하다못해 가까운 공원에서 회사동료들과 수다를 떨면서 먹는 도시락 맛은 꿀맛이다. 농사꾼들의 들밥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2002년 월드컵축구응원 때 편의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린 박지성삼각김밥이나 이청용도시락도 야외에서 먹는 그 맛과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은 돌고 돈다. 일을 해서 밥을 만들고, 밥은 또 힘을 만든다. 그리고 힘은 다시 일을 한다. 밥이 돌고 돌다보면 똥이 된다. 똥은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쌀을 만들고, 쌀은 다시 밥이 된다. 인간도 흙으로 돌아가 다시 밥이 된다.

돈은 팽이채처럼 밥을 빙글빙글 돌게 한다. 돈은 똥을 흙이 되게 하고, 흙에서 쌀이 나오도록 한다. 쌀이 밥이 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돈도 돈다. 돈이 돌지 않으면 밥도 돌지 않는다. 돈이 미친 듯이 돌고 돌아야, 밥도 신나고 즐겁게 돈다. 밥이 돌아야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밥이 된다. 그래야 여러 사람이 맛있게 나눠 먹을 수 있는 들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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