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서양 역사 깃든 비운의 여객선
●이재태의 종 이야기(53)
슬픔과 디아스포라의 여객선
언니는 시집을 일찍 갔다. 처녀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붙들려 간다는 소문이 돌자 아버지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김화자 할머니(가명, 90세, 당시 16세)는 7남매 중 둘째였다. 아래로는 남동생만 다섯이었다. 경주 안강읍의 ‘안경쟁이 김씨’는 유명한 일본 사람 앞잡이였다. 가마니를 짜고 있는데 안경쟁이 김씨가 일본 사람과 함께 집으로 왔다. “일본 군인 옷 만드는 데 가서 미싱도 배우고 하면 돈벌이도 좋고, 가마니 짜는 것보다 낫다고 카데. 돈으로 부쳐주냐고 물었지. ‘물론이지. 매달 월급 받으면 집으로 부쳐준다’고 그라데.” 할머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전장이 커지는데 여자들도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전부 일본 사람의 권리뿐이고, 조선 사람은 똥태 망태라.” 일본인이 조선인 한 명을 죽여도 말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안경쟁이 김씨를 따라 부산에 가서 ‘아사마 마루’라는 배를 탔다. 아사마 마루는 할머니를 미싱 공장 대신 타이완에 있는 위안소 ‘가게츠’로 실어 날랐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챙겨준 요깃거리를 기억했다. “갈 때는 봄이었다. 공출 다 줬으니 쌀도 없었다. 엄마가 작은 백설기를 서너 덩어리 쪄서주며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했다. 까만 콩을 삶아서 설탕하고 섞어서도 줬는데 한 이틀 밤을 잤던가? 먹을라고 하니 약간 쉬었더라. 그 때가 생각나지.” (“김화자의 증언. 끝났다. 뉘 말하는가?” 시사인 2016. 1.18)
우연하게 여기에 등장하는 아사마 마루라고 새겨진 작은 청동종을 만났다. 어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증언한 슬픈 기억 속의 배 아사마 마루(淺間丸)는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미국으로 항해하던 기선이었다. 아래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 여객선의 외관을 닮았고, 일본의 NYK선박회사(NYK Line, Nippon Yusen Kaisha, 日本郵船公社)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100만 영국 파운드를 들여 건조한 17,000톤 규모의 큰 배였다. 1929년 10월 아사마 마루호는 미국으로의 첫 항해를 출발하며, 청동제 기념 종을 제작하였다. 이 작은 청동종은 일본 요코하마와 미국을 오가는 탑승객에게 주거나 해양관련 기념품 수집가들에게 판매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사마 마루는 일본에서 홍콩, 상해, 요코하마, 호노룰루,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로 운항하였다. 관련 자료를 검색해도 조선의 부산에 정박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 이후 이 배는 일본군에 징발되어 전쟁에 투입되었으니 할머니의 기억대로 부산항에서 학병, 정신대 여성, 징용자와 전쟁 군수품을 중국, 대만, 동남아로 실어 날랐거나, 아마 다른 나라의 항구에서 이 배로 탑승시켰을 것이다.
여객선 아사마 마루호는 1929년 10월 7일 일본 고베에서 요코하마로 이동한 후, 호놀룰루를 거쳐 샌 프란시스코로 가는 첫 항해를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디젤엔진을 가진 첫 여객선이었고, 요코하마에서 샌 프란시스코까지는 15일이 소요되었다. 요금은 1등석 미화 315달러, 2등석 190달러였다. 이 배는 오랫동안 태평양 횡단하는 데 가장 빠른 기록을 보유하였고, 요코하마에서 샌 프란시스코까지 12일 7시간에 주파하기도 했다. 1년 동안 홍콩과 미국사이를 46회 왕복한 기록이 있다. NYK사는 아사마 마루의 성공에 힘입어, 1930년 두 척의 자매선을 더 건조하여 일본에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런던, 남아메리카, 캐나다까지도 항해에 나섰다. 1937년 9월 홍콩에 엄청난 크기의 태풍이 몰아쳤을 때, 이 배는 홍콩항에 정박 중이었다. 배는 큰 파도와 바람으로 해변으로 밀려났고, 바위에 부딪치고 마침내는 그 위에 올려지는 손상을 입었다. 당시로서는 워낙 큰 배여서 구조 활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배는 6개월이 지나서야 부양되었고, 나가사키로 옮겨서 수리된 후 다음해 9월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다시 취항되었다. 전쟁으로 자카르타와 싱가폴에 고립된 유럽인들을 대피시키거나, 소련에서 탈출한 폴란드 유대인 수백명을 미국으로 이송하기도 하였다.
1940년 1월 아사마 마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로 향하고 있었다. 배가 지바현 노지마 자키 35 마일 바깥 공해에 도달했을 때 영국 순양함 리버풀호로 부터 정지명령을 받는다. 리버풀호는 대포로 위협하였고, 13명의 무장 해군이 아사마 마루에 승선하였다. 선장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배에 타고 있던 50명의 독일 승객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고, 그중 21명을 리버풀호로 호송하였다. 아사마 마루는 이들을 하선하킨 후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였고 리버풀은 이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영국은 하선된 독일인들이 지상 레이더와 잠수함 기술자들로서 태평양에서의 작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파송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들은 스탠더드 오일사의 유조선에 근무하던 독일 노동자로서 휴가를 받아 독일로 가던 길이었다.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기 전이었으나, 많은 수의 독일선원이나 여객선 승무원들을 미국에 억류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1909년 체결된 런던협약에 어긋난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영국은 전쟁 중에는 공해상에서 승객이나 승무원 중 적국의 18-50세 사이의 남성은 전쟁포로로 잡을 수 있다는 논리로 반박하였다. 결국 일본정부는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이에 굴복하였고, 일본 여객선에는 더 이상 젊은 독일승객을 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 승객은 계속 승선할 수 있었다. “아사마 마루호 사건”은 전쟁 중 공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법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어있다.
1941년 7월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여기에 동조하여, 일본은 엄청난 해외자산을 잃게 되었다. 당시 호놀룰루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아사마 마루는 다시 요코하마로 귀환하여야 했다. 이후 배는 싱가폴, 마닐라를 운행하며 주로 일본인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제재를 피하기 위하여 선체에 검은 색을 칠하고 갑판의 일본 국기도 페인트 칠로 가렸다. 그해 11월 아사마 마루는 일본 해군과 항전대에 귀속되어 군인과 화물을 싣고 태평양의 사이판을 왕래하였다. 진주만 공격 이후에는 일본과 대만, 필리핀, 보르네오, 자카르타, 싱가폴, 및 태평양의 작은 섬들을 왕복하며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군 선박의 공격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기도 했다. 연합군 포로들을 싱가폴에서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임무도 수행하였는데, 시설이 열악하고 위생 상태가 나빴으므로 “지옥선”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배는 1944년 10월8일 일본 모지에서 상하이로 가는 마지막 항해를 나섰다. 5000명의 병사와 탄환, 군수품을 실은 수송 선단은 미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으나, 어렵게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29일 마닐라를 다시 출발한 배는 미군 정찰기에 노출되었고, 이어서 집중적인 잠수함 공격을 받는다. 필사적인 도주를 시도하였으나, 결국 11월 2일 새벽 여러 발의 어뢰가 명중되었다. 배는 1874명의 승무원과 포병, 그리고 많은 화물과 함께 침몰하였다. 김화자 할머니를 싣고 대만으로 날랐다던 그 기억 속의 배는 474명의 젊은 수병들을 안고 태평양 푸른 바다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여기 함부르크 아메리카(Hamburg Amerika)와 하팍(HAPAG) 글씨와 갈매기가 나는 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그림이 새겨진 또 하나의 황동종이 있다. 이 종은 HAL여객선사의 탑승객이나 수집가들에게 판매한 기념 종으로, 1910년경 제작된 높이 12cm의 묵직한 종이다. HAPAG은 1847년 설립된 함부르크-아메리카 선박회사(Hamburg-Amerika Line, HAL 旅客船社)의 독일이름이며, 독일 함부르크에 기반을 둔 선박회사였다. HAPAG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여객선회사였다. 독일,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를 떠나던 수많은 이민과 승객들을 주로 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로 운송하였다.
엘베강의 하구에 위치한 함부르크는 북해와 대서양으로 연결되고, 동쪽과 남쪽 내륙으로는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교통의 장점으로 인하여 이 도시는 이미 19세기 말에 인접한 브레멘보다 더 큰 항구가 되었다. 여기에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인, 당시 극심해진 러시아 짜르파들의 박해를 피해 망명을 하던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함부르크를 출발한 배는 영국 사우스햄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다. 이민자들은 뉴욕에서 배를 갈아타고 미국의 여러 동부와 남부의 도시, 그리고 캐나다의 동부도시로 이동하였다.
1914년 1차 대전으로 운항이 갑자기 중단될 때 HAPAG사에는 175척의 배가 있었는데, 큰 배는 1000명 이상을 수송할 수 있었다. 1912년 이 회사의 아메리카호는 첫 항해 중이던 타이타닉호에 빙산을 조심하라는 최초의 경고를 한 배였다. 항해 노선은 5 대륙으로 확대되었고, 2만명의 종업원이 근무하였다. 큰 증기기관선이 북 대서양을 횡단하는데는 1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북아메리카로 향하던 이민들은 값싼 3등실을 차지했고, 이곳은 침상이 다닥다닥 붙은 곳이었다. 그러나 좁고 혼잡한 것 외에는 비교적 편안하였고 하루에 세끼의 식사가 제공되었다. 성인용 3등석 요금은 처음 미화 20달러 정도였으나, 승객이 많아지면서 조금 인하되었다. 선박은 뉴욕입구인 뉴저지의 호보켄 부두에 정박했고, 이민수속을 위해 보트를 타고 1891년까지는 캐슬 가든, 이후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엘리스섬으로 이동하였다.
‘인종의 용광로’ 미국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이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1820년부터 2000년까지 6,60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왔다고 한다. 이민자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또는 그 나라에서 발생한 격변이나 재난을 피하여 미국 땅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1880년부터 50년간 미국으로 들어온 2700만명의 이민 대부분은 유럽에서 왔다. 이들 중 수백만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민의 90%이상은 배를 타고 왔고, 500만명 이상이 HAPAG선박으로 왔다. 배는 점점 커졌고 보다 안전하고 만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졌던 기선에 사업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배를 탔던 사람들은 드물었다. 독일 이민은 부족한 땅과 종교적 및 정치적인 압박을 피하기 위하여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회사의 유대계 독일인 사장 알버트 발린(Albert Ballin)은 1890년대에는 동유럽으로 영업을 확대했다. 함부르크 항에는 승객들이 일시적으로 숙박할 수 있는 건물이 마련되었다. 숙박시설은 이민자들을 소독하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미국의 항구에서는 이민자들을 검역하였고, 전염병이 발견되면 유럽으로 귀환시켰다. 거기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선박회사가 부담하여야 했다. 선박회사는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유럽을 떠나기 전에 전염병이나 중한 질병의 검진에 힘을 쏟았다. 신대륙으로 떠나는 이민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엘베강 하구의 베뗄섬에 ‘이민자의 홀(Auswandererhallen)’이라는 마을도 건설되었다. 최대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마을에는 유대인을 위한 예배당도 있었고 유대교식 식사도 제공하였다. 검역에서 병이 발견된 사람을 격리하고 관찰하는 시설도 마련되었다. 이 마을에 머물던 이민자들은 쿡스하벤 부두로 이동하여 배에 올랐는데, 이곳의 HAL 부두는 1969년 문 닫기 전까지 유럽의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붐비던 곳이었다.
발린 사장은 빠르게 운항하는 것보다, 배의 안전, 크기, 안락감, 그리고 고급 설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황제’, ‘조국’, ‘비스마르크’호로 명명한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배를 건조하였고, 두 척은 1차 대전 발발 전에 운행하고 있었다.
1917년 미국 여객선이 스페인 인근에서 독일 잠수함의 의뢰 공격으로 인명 피해를 입은 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조국’은 뉴저지 호보켄 앞바다에서 미국 군함에 나포되었고, 새 이름을 달고 연합국 함선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후에는 전쟁배상금의 명목으로 미국에 법적 귀속되었다. ‘황제’와 ‘비스마르크’도 같은 이유로 영국에 압류되어 민간 선박회사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영업을 재개한 HAPAG회사는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의 전화에 휩쓸리게 된다. 1940년에는 화물선 시애틀호가 독일전함과 노르웨이 포병 간의 포격전 도중 대포를 맞았고, 승무원들은 포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전쟁 중 나치정부는 유대인 알버트 발린의 이름과 그의 공적을 모든 기록에서 지웠다. 결국 HAPAG은 1차와 2차 세계대전에서 두 차례나 대부분의 선박을 잃었다.
1970년 HAPAG사는 경쟁사였던 브레멘의 북독일 로이드사와 합병하여 ‘하팍-로이드 물류회사’가 되었고, 발린의 명예도 다시 회복되었다. 초기의 이민자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넘어 마침내 뉴욕 항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현대에는 독일이민 혈통 5000만명, 유대인 500만명은 재건축된 베뗄섬의 이민자의 마을을 방문하여 그들 조상들의 이름을 찾아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동서양의 20세기의 새역사를 열었던 초대형 여객선 아사마 마루와 HAL 여객선은 웅장한 문명의 이기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갑판과 선실 곳곳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이 묻어있다. 깊은 바다로 사라진 그 배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보내졌던 어느 소녀의 슬픔과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숨어있는 것이다.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2주기 비오는 밤에 어린 영혼들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