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논리 물든 의료계... 의사도 감정 노동자
한미영의 ‘의사와 환자 사이’
우리는 흔히 많은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상대하는 백화점이나 친절을 강요 받는 콜센터 직원과 같이 서비스직 종사자들을 감정노동자라 생각한다. 병원의 경우 분명 서비스직이라 분류되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를 감정노동자로 보는 이는 극히 드물다.
감정노동자의 정의에 따르면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감추고 타인의 감정에 맞추면서 일상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서비스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아지면서 업무스트레스와 열악한 처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다.
의료서비스업에서 의사의 감정 노동은 상상 그 이상이다. 인터넷에서 긁어온 온 갓 의료정보를 진료실로 가져와 의사의 진료소견을 엉터리인 양 취급해도 오히려 환자를 설득시키고 다독여야 하는 것이 의사의 소명이다. 의사는 무시당하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강한 인내심으로 버티는 대표적인 감정노동자임이 분명하다.
특히 의사들은 사소한 오해와 편견에 노출되기 쉬운 특수 직업군 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보험이 안 되는 고가의 치료나 검사를 권하기라도 하면 본의 아니게 제 주머니 챙기는 부도덕한 의사로 오해 받기 쉽다. 여기에 더해 사람을 치료하는 특수 서비스 환경이 더해져 감정노동은 한 수위 더 높아진다.
치료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른 예후를 보이는 것처럼 의료에는 불확실성이 늘 존재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나 합병증이 발생하게 될 때 의료사고를 운운하는 환자나 보호자의 따가운 시선을 보듬고 불쾌한 감정들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들의 폭언과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서도 평정심을 찾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는 사람들이 바로 의사이다. 일방적인 감정테러에 대한 보호장치도 없이 오직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외로운 직업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엄격한 직업윤리와 높은 전문성을 요구하지만 이들을 감정노동자로서 인식하고 보호할 것을 주문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명성과 신뢰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의료진들에게 진료실 내 환자의 크고 작은 소란은 부정적인소문과 평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환자들에게 모진 말을 들어도 참아 넘기기 일쑤다. 얼굴 붉힐 일이 있더라도 조용히 넘어가야 하는 의사들의 속사정을 감안한다면 의료진들의 가슴앓이는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아픈 환자들을 대하면서 철저히 불쾌한 감정을 숨기며 예의를 다하는 게 의료진의 기본적인 업무태도이다. 이러한 감정노동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감정을 숨기며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감정 조절에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실제 감정노동자의 25%가량이 감정조절과 감정표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통계도 보고되고 있다. 화를 참지 못해 언행이 거칠어 질 수도 있고, 무심코 넘길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감정을 통제하고 표현하는 일을 부담스러워 하게 된다. 결국 함께 일하는 동료나 팀원들과의 소통이 단절되고 마찰이 잦아져 조직생활을 자체를 버거워 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노동자는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넘어 사람에 대한 대면을 거부하는 대인기피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스스로 마음에 문을 닫아 의식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고립된 환경에서 안정감을 찾는 의료진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의료진은 표정 하나하나에도 민감해 하는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대화에 집중해야 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보듬어야 하는 철저히 인격과 품성에서 완벽해야 하는 전문직업인이다. 일각에서는 의사를 포함해 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 역시 감정노동자로 분류해 감정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적절히 관리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필자 역시 강력히 동의한다.
감정노동연구소 김태흥 소장은 ‘감정노동의 진실’이란 저서에서 고객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그 이유를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조직의 단단한 방침이 뒷받침 되고, 진상고객이 더 이상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보호책이 만들어 질 때 감정노동자의 안전한 업무가 가능하다고 했다. 감정노동자를 무시하는 언행으로 인격적 침해를 한다면 고객이 고객으로서의 대접받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김소장의 지론이다.
그간 감정노동자로서 폭행과 폭언으로 상당시간 방치된 의료진들을 보호하고자 한 의료인단체가 용기를 내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좋은 치료는 신뢰와 존중으로부터 출발하며, 서로 견해가 달라도 과격한 언행은 삼가 해야 한다.”라는 표어로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는 ‘존중’이 전제가 됨을 거듭 강조했다.
더 이상 감추지 않고, 환자와의 신뢰를 찾기 위해 과감히 나선 이들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의료진 모두가 감정노동자로 폭언과 폭행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의료계 모두, 예의를 지키지 않는 진상환자가 소비자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때 불만이라는 미명하에 방치하고 용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감정노동자에 대한 피해를 공감하고 주종관계의 잘못된 소비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시장 논리에 내몰린 의료진들이 소신껏 진료하고 인격권을 지킬 수 있다면 서로가 힘을 합치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 하다. 혼자는 힘들고 버거워도 여럿이면 해 볼법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