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 순간에도 당당... 불꽃처럼 살다 간 여왕

참수 순간에도 당당... 불꽃처럼 살다 간 여왕이재태의 종 이야기(50)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587년 2월 8일. 메리 여왕의 기도가 끝나자 사형 집행인들은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들의 역할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여왕은 “나는 진심으로 그대들을 용서하네. 그대들이 나의 모든 괴로움을 끝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네.”라고 하였다. 집행인과 두 명의 시녀는 여왕을 부축하여 일으킨 후 겉옷을 벗겼다. 여왕은 어린 양이 새겨진 목걸이를 벗어 시녀에게 주었고, 염주와 옷을 벗기는 것에 대한 슬픔보다는 기쁨을 느끼는 듯 보였다.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옷을 벗겨 주는 남편을 가진 적이 없었고,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어본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여왕이 속옷과 가운만을 입은 상태가 되자,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여왕은 그들을 품에 안고 키스를 하며 “너희들을 위해 기도했다. 너희들도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 울지 말고 기뻐해 달라”고 하였다. 처형대 근처에 있던 시종들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자, 여왕은 그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시녀가 성체보자기에 키스를 한 다음 보자기를 여왕의 머리에 씌우고 고정시켰다. 여왕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찬송가를 부른 후, 도마를 더듬어서 그 위에 머리를 올렸다. 도마 위에 엎드린 여왕은 두 팔을 뻗으며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를 몇 차례 외쳤다. 집행인 한명이 엎드린 여왕의 몸을 살짝 잡자 다른 한명이 도끼날을 휘둘렀다, 여왕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집행인은 잘려진 여왕의 머리를 치켜들고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하고 외쳤다. 그러자 수석 사제가 큰 소리로 “여왕의 적들은 이렇게 사라지도다.”라고 외쳤다. 이어 켄트 후작이 시체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굽어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왕과 복음의 모든 적들에게 이런 최후가 있을지어다”. 사형 집행 후 여왕의 다리에 감긴 데님을 풀자, 옷 속에 숨어있던 작은 강아지가 나왔는데,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겨우 떼어냈다.(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역사의 원전, 2007, 바다출판사) 

로버트 윙크필드가 기록으로 남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장면은, 16세기 영국 역사에 한 개의 방점을 찍으면서도 새로운 역사가 써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성공회 사제가 메리 여왕의 처형 후에 외친 또 다른 여왕은 후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잉글랜드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재위:1542 ~ 1567년)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와 왕비 마리 드 기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은 메리가 태어난 지 6일 만에 사망하였고, 메리는 생후 9개월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해밀턴백작과 어머니 기즈가 섭정을 했다. 대부분이 프로테스탄트였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국가를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메리여왕 할머니의 친동생인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는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를 강압적으로 약혼시키며,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잉글랜드는 침략을 하여 스코틀랜드 군을 초토화 시켰다.

프랑스 왕족 출신이었던 기즈는 딸의 장래를 걱정하여 잉글랜드의 숙적인 프랑스 앙리 2세 왕의 아들 프랑수아 2세와 약혼시켰고, 1548년 그녀를 프랑스로 보내 가톨릭으로 키웠다. 메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180cm가 넘는 큰 키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1558년(16세) 결혼한 뒤, 다음 해에 남편이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므로 메리는 스코틀랜드 왕과 프랑스의 왕비를 겸하게 된다. 이 해에 잉글랜드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는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2세가 1년 뒤에 사망하자, 18살의 메리는 후원자를 잃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야만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영토 분쟁 중이었고, 국내에서도 종교 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스코틀랜드의 공식 종교가 개신교로 바뀌었고, 가톨릭교도인 메리는 귀족들 사이에 선 낯선 이방인이었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쓰며,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쳐 귀족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했다.

필자가 정리한 그림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메리는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는 오촌 사이였기에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계승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간통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린의 딸이었기에, 사생아라는 조롱을 받고 있었다. 이혼이 허용하지 않던 가톨릭 세력은 헨리 8세가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한 것은 무효이며, 진정한 왕위 계승권자는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메리라는 주장이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이런 주장을 펼치며 잉글랜드를 압박했으므로, 엘리자베스여왕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를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1565년 메리는 단리경(卿) 헨리 스튜어트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헨리도 잉글랜드 왕족의 혈통이었고 메리의 세 살 아래인 4촌 동생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더욱 경계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불만이었던 메리의 이복 오빠인 모레이 백작은 개신교 귀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다음 해에 메리는 임신을 하자, 헨리는 자신이 왕의 칭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메리에게 앙심을 품는다. 그는 귀족들과 공모하여 메리 앞에서 그녀의 신뢰를 받던 비서 데이비드 리찌오를 살해했다. 그러나 헨리와 귀족들에 의해 감금되었던 메리는 무사히 아들 제임스 스튜어트를 낳았다. 그리고는 남편을 설득해 함께 탈출하였다. 일을 주모한 헨리가 갑자기 변심을 하자 귀족들은 분노했고, 1567년 2월, 헨리는 의문의 살해를 당하였다. 헨리의 살해에는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해 4월 보스웰 백작은 메리를 납치하여 13일간 같이 지내며 결혼을 강요했고, 추문을 걱정한 메리는 그와 결혼을 하여야 했다.

헨리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죽인 보스웰 백작과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는 메리가 그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6월에는 모레이 백작과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메리는 무력분쟁을 피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항복하고 보스웰 백작은 노르웨이로 도망갔다가 죽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약속을 어기고 메리를 성에 감금하였고 왕위에서도 물러나게 했다. 그녀의 생후 1년이 지난 아들 제임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다음 해(1568년)에 메리는 탈출하여 다시 군사를 모았으나 바로 진압되었다. 그러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잉글랜드로 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에 도착한 그녀를 칼라일 성에 감금하였고, 메리는 잉글랜드에서 남편 헨리를 죽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으나 단 한 번의 만남이나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메리는 셰필드에서 18년 동안 계속 유폐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메리는 유폐된 상태에서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메리는 유폐를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애원하였으나, 나중에는 반란의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메리를 중심으로 모반을 도모하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더 이상 왕위를 노리지 못하도록 반역죄로 몰았다. 이때 제시된 증거가 위조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메리는 재판에서 결백을 주장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가톨릭을 탄압하던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개입을 두려워하였으나, 메리가 재판을 받던 때에는 프랑스 내전에 스페인이 개입하고 있어서 이들 가톨릭 국가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던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1566~1625, 1603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제임스 1세)조차 자기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1587년 2월 8일, 메리는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서 노스햄프턴셔의 사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러나 가톨릭인 메리의 죽음은 전통적인 가톨릭 왕국인 에스파니아(국왕은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메리여왕의 아들 제임스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로 등극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죽는 순간까지도 정통적인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내면에는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를 누구보다 의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임스는 어머니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모셨다.

영국의 고햄사가 역사를 바꾸었던 6명의 여성을 주제로 청동종을 주조할 때, 비운의 메리여왕을 그 중 1인으로 선정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유분방한 생활로 세 번이나 결혼하였던 메리여왕은 영웅이자 뛰어난 여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혼돈에 빠진 국가를 통합하여 다시 일어서고자 하였던 시도는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성실한 실패로 인정받는 것인지? 오랫동안 스코틀랜드를 억압해 온 잉글랜드에 의해 참수되어 스코틀랜드인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 남은 것인지?

16세기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두 여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에 자신의 통치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성공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메리 스튜어트는 죽음의 칼이 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아들에게 이어져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하게 되는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불꽃같은 삶을 살고 그 불꽃에 스스로를 태워버린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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