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울, 서울.... 5000년 역사를 바꾼 그날
●이재태의 종 이야기(39)
호돌이의 추억, 88 서울 올림픽
오천년 역사 상,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가장 뚜렷하게 남겨준 단일 사건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라는 데 동의를 할 것이다. ‘88 서울 올림픽’은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전쟁 폐허의 가난한 나라', '냉전의 최전선', '군사 독재 국가'에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이룬 나라’라는 긍정적인 면으로 변화시켜 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올림픽을 계기로 경기장뿐 만 아니라 동네(송파구, 오륜동)가 건설되었으며, 한강이 정비되며 강을 따라 올림픽대로가 개통되는 등 서울은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전 세계의 시청자는 TV화면으로 중계된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부채춤의 향연을 보며 한강의 기적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축제를 준비하기 위하여, 정부와 민간, 기업 모든 분야가 총력을 기울였다. 필자는 88올림픽과 86아시안 게임이 있었던 3년 동안에 군복무를 하였는데, 군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강원도 비무장지대 부대의 군의관으로 생활하던 시절에는 1주씩 밤낮을 바꾸어 생활하는 ‘주야간 적응훈련’을 몇 차례 했던 기억도 있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밤이 되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차양막을 치고 일했고 한 밤 중에 점심식사를 하였다. 해가 뜬 이후에도 차양막을 내린 상태에서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누워있으니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름에 일과를 한 시간 일찍 시작하는 ‘썸머 타임제’도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폭탄테러나 국적 항공기 피격사건도 있었지만, 휴전선에는 남북 공히 확성기 방송을 통한 심리전도 활발하였다. 당시 휴전선의 북쪽 확성기는 몇 차례나 김일성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덕분에 완전군장 차림으로 비상근무에 들어갔다가는, 심리전이라고 결론이 나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곤 하였다. 김일성은 올림픽이 끝난 6년 뒤에 사망하였다. 올림픽 전에는 민주화의 열풍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이유로 올림픽 개최권이 반환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6.29 선언으로 마무리되면서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된 것이다.
‘서울올림픽’과 ‘아시안 경기’의 공식 마스코트는 귀여운 한국 호랑이를 모델로 한 ‘호돌이’였고, 여성 호랑이 ‘호순이’도 만들어졌다. 디자이너 김현의 작품이었고, 상모를 한 농악대 차림의 호돌이의 상모 끈은 ‘S’를 하고 있는데 서울의 영문 첫 자를 표현한 것이다. 디자이너가 처음 제출한 그림을 수정한 마스코트로 확정되어 각종 물품의 캐릭터로 등장하였다. 올림픽 정식종목과 시범종목을 망라해 모두 28종목의 호돌이 또는 호순이 마스코트가 제작되었다.
호돌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미국의 시리얼 제조사 켈로그는 호돌이가 자사의 광고 캐릭터인 ‘토니’와 유사하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서울 올림픽조직위원회가 한국에 판매되는 타사의 시리얼 푸드에는 호돌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서야 소송이 마무리되었다. 우리 정부는 올림픽 개최 전 매월 15일을 ‘호돌이의 날’도 지정해 여러 문화행사와 시민 참여 캠페인 등을 열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종은 서울 올림픽 공식 기념품인 호돌이, 호순이를 주제로 한 5종류의 에나멜 금속 종이다. 곰방대를 문 호돌이 영감과 신부 호순이, 부채춤 추는 호순이, 금메달리스트 호돌이가 금속 종의 손잡이로 만들어졌는데, 다른 나라의 종들과도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는 앙증맞고 예쁜 종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올림픽 공식 기념품이지만 사실 필자는 이 종을 미국 LA의 수집가로부터 구입하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종이 사용되지 않으므로, 많은 경우 수출이나 외국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종들을 외국에서 역수입하는 경우가 있다.
88 서울올림픽은 1979년 9월 서울시장의 올림픽 유치 기자회견으로 시작되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후 관련 인사들이 사라지며 잊혀 진다. 그러나 제5공화국이 국민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스포츠를 장려하면서, 올림픽 유치 계획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경쟁 상대였던 일본 나고야는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해왔기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고 예측했고, 남덕우 국무총리와 서울시는 과도한 예산 부담을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88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여 나고야가 개최도시가 된다면, 대륙 간 안배원칙으로 가까운 시기에는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기는 어려웠다. 또한 20세기가 지나면 중국이 부상할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개최는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이에 정부는 유치에 총력을 다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부는 노태우 정무장관과 정주영 현대회장을 앞세우며 본격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느긋하게 준비하며 승리를 자신하던 일본에 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마침내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물리치고 88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과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로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분석되었다. 또한 일본의 표밭이었던 유럽 국가의 공략은 독일의 스포츠 용품회사인 아디다스의 역할이 많았다. 아디다스는 독자적인 브랜드가 많은 일본보다 한국을 선호하였고, 덕분에 88올림픽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제24회 서울 올림픽은 88년 9월 17일부터 15일 동안 ‘화합과 전진’의 슬로건 아래 역대 최대인 160개국에서 8391명이 참가하여 263개의 금메달을 놓고 승부를 펼쳤다. IOC 회원국 대부분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LA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서방과 공산 진영이 각각 불참하면서 반쪽 대회가 되었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모스크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88 올림픽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공산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공산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마침내 오래 전부터 소련의 노선을 따르지 않았고, 이미 84 LA 올림픽에도 참가하였던 중국과, 자국민들의 불만으로 LA에 이은 2회 연속 올림픽 불참이 어려웠던 스포츠 강국 동독이 참가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의 참가 여부가 불투명하여 동유럽 국가들과 다른 친소 국가들의 참가 결정은 쉽지 않았다. 조직위원회는 소련의 설득에 최대의 노력을 하였다. 마침내 소련이 참가 선언을 하자 헝가리, 폴란드, 체코, 몽골, 라오스, 베트남과 친북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최종적으로 불참하였고, 쿠바, 알바니아, 마다가스카르 등의 공산 국가도 동조 불참하였다.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캄보디아는 자국의 사정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인종차별 정책으로 IOC에서 축출된 남아공화국은 참가할 수 없었다.
개막식 입장은 한글 ‘ㄱㄴㄷ’순대로 진행되었으며, 올림픽의 기원이 된 그리스에 이어 가나가 2번째, 홍콩이 159번째, 그리고 마지막에 개최국 대한민국이 입장하였다. 개막 행사 중에는 윤태웅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퍼포먼스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전쟁의 잔상이 강했던 한국에 대하여 평화의 이미지를 강조시켜주고 동서양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한다는 의미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모든 언론은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인공인 손기정이 올림픽 성화의 최종 점화자라고 예상하였으나, 그는 최종 봉송주자였다. 점화는 노태우 정부의 슬로건인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서울 시민들이 선발되었다. 88 올림픽의 성화는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엘리베이터로 운송된 후 성화대에 점화되었다. 점화한 불꽃이 갑자가 강하게 솟아오르는 바람에 성화대에 앉았던 비둘기들이 ‘통닭’이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88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획득하여,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메달 순위 4위에 올랐다. 유도 레슬링 권투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고, 양궁의 김수녕은 우리나라의 첫 2관왕이 되었다.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88 올림픽의 최다 금메달리스트는 남자 수영 5관왕인 미국의 맷 비욘디와 여자수영 6관왕인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였다. 역도 55kg급에서는 터키의 나임 술레이마놀루가 우승했다. 오랫동안 인간은 자기 몸무게의 3배 이상은 들 수 없다고 믿어져왔으나, 그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190kg)를 들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캐나다의 벤 존슨은 100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으나,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인 단백동화 스테로이드가 검출되어 실격 당하였다. 대신 미국의 칼 루이스가 LA에 이어 2회 연속 금메달을 얻었다. 미국의 그레그 루가니스는 남자 다이빙 경기 중 뒤로 돌기를 하다가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치며 피를 흘리는 사고를 당하고도 2종목 모두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자신이 AIDS에 감염되었다고 고백하였는데, 그와 같이 경기한 많은 선수들은 감염에 대하여 걱정하였고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되었다.
88 올림픽에서는 탁구가 처음으로 정식종목이 되었고,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테니스는 64년 만에 다시 정식종목이 되었는데, 독일의 스테피 그라프가 여자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편파 판정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한국의 박시헌이 출전한 복싱 미들급의 결승전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경기를 하고도, 승리 판정을 받은 것이다. 박 선수 본인도 “조국이 나의 은메달을 뺏어갔다”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최악의 판정 중의 하나로 꼽혔다. 존스는 강하게 항의했으나 번복되지 않았고, 그는 프로로 전향하여 세계 챔피언이 되어 명예를 회복하였다.
88 서울올림픽으로 우리 국민들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졌고, 해외여행도 자유로워 졌다. 자가용을 소유한 중산층이 증가하였고, 국민들은 점차 레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의 후유증을 대비하지 못하여 IMF 사태의 시발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바로 어제 열린 것 같은 88년 올림픽과 호돌이에 대한 추억도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한밤에 휴전선 철책을 따라 순찰에 나섰던 순간들도 필자의 기억의 창고에 30년 전의 어느 한 순간으로 박제화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