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사랑하고 사랑받아 행복했노라”
●이재태의 종 이야기(38)
낭만과 사색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그리고 대학
독일 남서부 네카르 강이 라인강에 합류되는 지점의 하이델베르크는 낭만적이며 철학적인 분위기의 작은 도시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사유하던 유명한 사상가들이 있었고, 문호 괴테는 30년 이상 젊었던 연인 마리안네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을 도시에 남겼다. 마리안네는 그 사랑의 감정을 하이델베르크 성의 허름한 담벼락에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였노라”라는 글귀로 남겼는데, 지금도 수많은 청춘들이 그곳을 방문하고 있다.
마이어 푀르스터의 소설 (Alt Heidelberg, 구 하이델베르크, 1899년)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1954)’은 우리에게 언젠가 한번쯤은 이 도시를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 준 것 같다. 독일 소공국의 칼 하인리히 황태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하숙집 딸 캐티와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이별을 겪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간 영화였다. 황태자의 순박한 사랑 이야기는 맥주집 ‘로텐 옥센(붉은 황소)’, 하이델베르크 성과 카를 테오도르 다리 등을 오가며 그려졌다. 황태자가 신입생들과 선배들 앞에서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던 대학의 전통적인 신고식을 치를 때 울려 퍼지는 마리오 란자의 ‘축배의 노래 Drink! Drink! Drink!’, 그리고 케이티와 첫 데이트에서 불렀던 ‘세레나데’는 이 도시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사실 하이델베르크는 1385년 독일에서 가장 먼저 대학이 설립된 도시다. 이 도시에서 이루어졌던 낭만과 사랑마저도 모두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연관되었을 정도로 대학 도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공식 명칭은 ‘루프레히트 카를스(Ruprecht-Karls)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이며, 도시의 주민 14만 명 중 3만 명이 학생이다.
독일에는 14세기 중반까지는 대학이 없었다. 1378년 발생한 ‘교회 대분열’로 인하여 팔츠의 수도였던 하이델베르크는 지역 고유의 대학을 설립할 기회를 얻었다. 교회 대분열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후,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며 시작되었다. 프랑스에 의해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이탈리아 추기경에 의해 선출된 교황 우르바누스 6세는 로마에 위치하였다. 독일은 로마의 교황을 지지하였으므로, 파리에서 공부하던 독일 학생과 교사들은 파리를 떠나야만 했다. 선제후(選諸侯) 루프레히트 1세는 이를 기회로 대학 설립을 청원하였고, 로마교황으로부터 허가를 얻었다.
1386년 10월 18일에 대학의 설립을 알리는 ‘특별미사’가 거행되었고, 다음날에 첫 번째 강의가 개설되었다. 네덜란드인 마르질리우스가 첫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교수들은 대부분 파리와 프라하에서 부임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파리대학을 모델로 철학, 신학, 법학으로 출발하였고, 1388년 의학부가 추가되어 4개 학부로 구성되었다. 대학은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1390년에는 재학생이 185명에 달하였다. 대학의 직인에는 사도 베드로가 수호성인으로 새겨져 있고, 총장 직인에는 팔츠의 사자가 일어서서 책을 들고 있다. 펼쳐진 책에 쓰인 ‘셈페르 아페르투스(Semper Apertus, 언제나 열려있는)’가 이 대학의 슬로건이다.
중세의 종교개혁 시 하이델베르크의 학자들은 마틴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556년 하인리히 선제후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가톨릭계 대학에서 신교대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신교와 구교 간의 ‘30년 전쟁(1618~1648)’으로 인해 폐쇄와 개교를 반복하였다. 1652년에 다시 개교하였으나, ‘왕위계승전쟁’의 여파로 1703년까지 또 다시 폐쇄되었다. 전쟁 후에 발생한 ‘반종교 개혁’은 대학의 색깔을 ‘신교’에서 ‘예수회’로 다시 변화시켰다. 예수회는 ‘구대학(Old University)’을 신축하고 대학 발전에 노력하였으나, 예수회의 영향력 감소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는다. 1803년 독일 바덴주의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는 칙령으로 주정부가 대학 재정을 지원하였고, 라인 강 우측의 영토도 대학에 할양하여 마침내 대학이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805년 ‘루프레히트-카를 대학교’로 개명하여 창립한 루프레히트와 부흥시킨 카를을 같이 기억하게 된다.
히틀러 치하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다른 독일의 대학들처럼 나치를 지지하였고, 많은 반체제, 유대인 및 공산주의 교수와 학생들은 테러를 당하거나 해고되었다. 전체 214명의 교수 중 59명이 대학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대학의 모토인 “살아있는 정신에게”는 “독일 정신에게”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결과로 2차 대전 패전 후 대학은 나치 청산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선정 세계 대학 순위에서 독일에서 1위, 유럽에서 14위였다. 이 대학 졸업생과 교수들은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철학자 포이에르바하, 작곡가 슈만, 소설가 장 파울, ‘심리학의 아버지’ 빌헬름 분트, ‘물리학의 아버지’ 조지아 깁스, 대륙이동설을 주장한 알프레트 베게너, 주기율표를 만든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 등은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헬무트 콜 수상도 유명한 졸업생이다. 헤겔, 막스 베버, 가다머, 야스퍼스, 하버마스는 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은 56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이 대학과 연관돼있는데, 9명은 대학 재직 중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현재에도 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886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개교 5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통일을 이룩한 독일제국의 최고 대학은 대학의 위상을 만방에 과시하고자 하였고, 높이 15cm, 무게 500gm의 청동종도 만들었다. 종 몸체 아랫부분에는 ‘1386-1886, 500주년 기념을 기억한다’는 글이 있다. 손잡이의 전면에는 ‘1386년 루프레히트와 그의 얼굴’이, 반대편에는 ’1886년 프리드리히 바덴과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과 같이 학문 연구와 교수 활동이 이루어지며, 일정한 시험제도와 학위제도를 구비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은 중세 말기에 처음 시작되었다. 대학을 뜻하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는 ‘모두’를 뜻하는 라틴어 'universitas'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집합체' 또는 '합법적인 단체'를 의미하였는데, 자기 집단의 이익을 증진하고,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구성된 ‘교육 길드’와 같은 것이었다. 초기 대학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하였는데, 십자군 전쟁으로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고, 동서양의 교류로 신학문이 도입되고 학문의 대부흥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유명한 교사가 있는 유럽 도시에는 많은 학생들이 새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객지에서 생활하던 외로운 처지의 학생들은 서로를 돕고 보호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학생들의 조직이 바로 중세 대학이 발생하게 된 일차적 계기가 된 것이다. 학생들의 ‘조합組合, 길드’는 그들의 권익을 증진시키고 도시 주민들의 위협으로 부터의 자구 수단으로서 결성되었다. 당시의 대학은 고정된 교육 장소가 없어서 이동을 해가면서 강의를 받았는데, 때로는 교수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버리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교수들로 부터 그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학생 조합은 교수들과 계약을 체결하여 강의를 규제하였고, 집단 수업거부 등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였다.
초기 대학의 교수는 학생조합의 허가 없이는 단 하루의 휴강도 허용되지 않았고, 여행을 하려면 귀환을 보증하는 공탁금을 낼 정도였다. 교수들도 학생조합에 맞서서 교수조합(college)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가입할 수 있는 교수가 되려면 시험을 거쳐 가입자격증을 취득하여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학식의 증명으로서 또는 교수의 면허장으로서 이러한 ‘가입자격증’을 취득하려 했는데, 그 증명서인 ‘교수면허’가 대학에서 수여하는 최초의 학위의 형태가 된 것이다. (참조: 대학의 기원, 짱구의 네이버 블로그)
이처럼 초기 대학은 학생조합과 교수조합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나, 대학은 점차 교수조합과 학생조합을 초월하여, 서로 결합되며 발전하게 된다. 이후 ‘대학’은 학문연구를 위한 교수와 학생의 자율적인 학문공동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국가나 시의 지원 하에 대학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대학은 왕이나 교황으로부터 병역면제,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받았고, 국가나 교회의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권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은 이른바 ‘국가 속의 국가’가 되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유명한 '학생 감옥'이 있었다. 독일 대학은 독자적인 사법권을 가졌는데,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자체적으로 재판하여 학생 감옥에 가두었다. 학생의 경범죄는 경찰이 간섭하지 않았고 재판에 따라 침대와 책상만이 있는 방에서 2-4주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수업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상 처음 등장한 대학은 이탈리아 볼로냐대학(1088년)이다. 중세에 도시가 성장하면서 교황과 황제의 세력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데, 도시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률 연구에 집중하였다. 볼로냐대학의 교수들이 로마법 필사본을 개정한 새 법률안은 유럽 사회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고, 도시들은 대학을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파리(1109년), 옥스포드(1167), 케임브리지(1209)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프라하, 비엔나 등에도 대학이 설립되었다. 1,500년 당시 유럽에는 79개의 대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대학은 기독교로 부터 독립된 학문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성직자, 의사와 법관들을 키우기 위하여 고전과 인문과목을 주로 가르쳤다. 대학의 학사 조직을 학부(Faculty)라 하였는데, 교양학부와 고등 직업교육기관인 의학부, 법학부, 신학부 등 4개 학부로 구성되었다. 자연과학 학부는 19세기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 훔볼트는 교육에 국한되었던 대학의 기능에 연구 기능을 추가하였다. 독일형 연구대학은 미국으로 전파되었고, 전통적으로 신사를 양성한다는 단과대학(칼리지)의 임무를 초월하게 된다. 20세기 들어 산업 발전과 함께 대학에 사회봉사 기능이 더하여졌고, 자연과학, 응용과학, 사회과학등도 도입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교가 추구하는 교육, 연구, 봉사를 덕목으로 하는 미국형 종합대학교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21세기 들며, 팽창위주의 정책만을 추구하던 우리의 대학들은 존폐의 위기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처음 대학을 만들며 연구하고자 하였던 인문학은 천대받고 있으며,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신사를 뜻하거나 취업의 보증 수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시대, 대학이 시작되던 시기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서 대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처럼 제목을 달아놓고 도시와 대학 설명만 잔뜩 써놓은 글이네요 이렇게 제목다시면 안됩니다. 이건 천한 낚시질입니다. 사랑에 관한 글을 읽고 싶지 그도시 그대학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지 않은 저같은 사람에겐 사기질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