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시대, 시민 안방에 들어온 귀족문화
●이재태의 종 이야기(34)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 브론즈
지금은 인구 820만에 불과한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가 우리 인류의 철학, 의학(정신분석학), 경제학, 문학, 예술 분야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비엔나가 인류의 삶에 중요한 공헌을 한 성취의 대부분은 20세기 전후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19 세기의 비엔나는 근대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우아한 고전 예술과 고풍스러운 품위, 그리고 격식이 중요시되던 도시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많은 민족들 간의 내부적인 반목과 분열이 잠재되어 있었고, 신흥 강국 독일은 이 나라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제국의 중심 도시에서 급진적인 현대 도시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도시 전체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이 가득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시는 몰락하는 구체제 유럽의 전형적인 모순을 압축하여 담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구체제가 해체되며 방출되는 거대한 에너지를 내 뿜고 있었다. 시민들은 제국의 몰락으로 점차 무너져 내리는 현재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상상속의 미래의 꿈 사이의 간격으로 인하여 불안하기도 하였으나, 그들 내부에는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중세 이후 유럽에는 매 100년마다의‘세기말’이 되면 허무와 절망적인 분위기가 가득하고 사회 전반에 퇴폐적이고 음울한 풍조가 만연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 비엔나의 분위기는 달랐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반혁명 분위기와 정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 나갔고,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거기에는 변화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가득하였고, 열정으로 변화를 직접 만들어가고 있었다. 보다 자유롭고 유연한 생각을 하던 시민들은 이전 세기말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격동기의 거대한 에너지는 사회 전 분야에서 분출되며 수많은 자유주의자가 활동하며, 예술적 자아 정신이 가장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켰다. ‘링슈트라세’로 대표되는 비엔나 거리에서 활약한 프로이트, 클림트, 말러, 바그너, 쇤베르크, 코코슈카는 이 시기의 새로운 사조를 창조한 사람들이었다.
비엔나 브론즈 (Vienna Bronze, 비인 청동)는 이 시기에 비엔나에서 유행한 조각 공예였다.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은 보다 우아하고 멋있는 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귀족들의 삶을 동경하며 화려한 왕궁이나 성에 전시된 예술품이나 커다란 조각상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예술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그것들을 직접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시민들도 집안에 예술품을 두게 된다. 궁전과 도심 광장에 전시된 대형 동상이나 조각품을 소유할 수 없었으므로, 집 내부를 올망졸망하고 아름다운 모양의 조각품, 일상 생활품을 포함한 도자기, 유리 공예품, 램프 등으로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론즈는 일단 주형을 만들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 장인들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작품들을 대량으로 제작하였다. 비엔나 브론즈는 인물이나 누드 여성, 다양의 새, 개구리, 돼지, 개, 고양이, 벌레, 등등의 동물, 동양풍물, 시장 풍경 등을 자연스럽고 상세하게 표현한 우아한 조각품이었다. 크기는 수 mm의 작은 것에서 거의 1m의 크기까지 다양한 형태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부분 별로 조각된 후에 다시 전체적인 모습으로 조소되는데, 둥지위의 새가 있는 청동조각품은 한사람이 새를 만들고 둥지는 따로 만들어 서로 붙이는 과정을 거쳤다. 이어 젖은 모래 틀을 만들고 끓는 청동을 부어 조각품을 만드는 사형주조(sand cast, 砂型鑄造) 법으로 제조하였다. 거푸집을 식힌 후, 떼어내면 하나하나의 조각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장인이 조각품을 완성하면, 2,3명의 여성들이 오일 페인트로 세심하게 여러 겹의 칠을 하였는데, 이렇게 만든 것을 ‘cold painted bronze’라 한다. 자연스러운 색깔로 칠해지거나, 고색창연한 모양, 또는 금빛 도금을 입힌 것이다.
당시 비엔나 브론즈를 제작하던 장인은 120명 정도가 있었으나,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다. 가장 잘 알려진 마티아스 베르그만은 공방을 운영하며 2~3만 개의 청동 조각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는 처음 파이프에 금속장식을 하는 작업 일을 했으나, 점차 주조, 양각, 페인팅 기술을 사용한 브론즈 제품을 만들었다. 그의 후손들은 베르그만 공방을 계속 운영하며 아르누보 조각품, 청동 인장을 만들었고, 전쟁 중에도 초기 주형을 잘 보존하였으므로 1990년대 까지도 계속 생산하였다.
비엔나브론즈는 19세기의 실용적이고 간소한 양식인 ‘비더마이어(Biedermeier)의 시대'에 집중적으로 생산이 되어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부르주아 층들이 그들 자체의 생활을 만들고, 사교 생활을 한 것이다. 유럽 문화사에서 시민 문화로 알려진 비더마이어 문화는 원래 귀족들의 문화였다. 나폴레옹 치하에서 금욕적으로 생활하던 황실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감각의 현대 예술 취향을 발달시켰다. 바로크의 복잡한 금빛 천사와 은빛 큐피드 동자 대신 단순한 직선과 평면 디자인을 택한 것이다. 서재는 간소화 하였고, 둥근 영국식 탁자는 복잡한 왕궁의 공식 행사를 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곳이 황실의 식구들이 담소하는 사생활 공간이라는 인식을 준 것이다.
비더마이어는 근대화의 예고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고, 비엔나 공방의 제품은 모두 실용적인 제품의 표본이 되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황실의 취향을 흉내 내어 인테리어 가구들을 대량 생산하고 소비하기 시작하자, 황실은 다시 장인들의 화려한 신(新)로코코 예술로 되돌아갔다. 비엔나 브론즈는 이러한 배경 하에 식탁의 장식품, 고급 장난감, 선물 용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필자는 우연히 어느 종 수집가의 수집품에서 비엔나 브론즈을 만났고, 그들의 다양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처음 만난 비엔나 브론즈 조각가는 페터 테레스주크(Peter Tereszczuk, 1875년-1963년)였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갈리시아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인 능력을 눈여겨 본 어느 귀족의 지원으로 비엔나로 보내졌다. 비엔나의 ‘예술 및 공예 학교’에서 수학한 후, 보헤미아에서 교수로 활동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 생애 나무, 상아, 청동 조각품들을 만들었다. 특히 아름다운 소녀, 그 시대의 생활상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의 쌍둥이 딸들이 모델이 되었다. 그는 2차 대전후에는 다시 바로크 풍의 나무 조각에 전념하다가 89세로 비엔나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단순한 청동 조각을 만든 것에서 발전하여, 상아를 사용하여 얼굴이나 상체, 팔을 만들고 청동으로 하반신이나 몸체를 만들어 조합시킨 작품을 완성하였다. 상아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청동 조각과 잘 일치하도록 하나하나 붙여야 한다. 그의 작품에는 P. Tereszczuk과 AR이라는 명문이 들어가 있는데, AR은 그와 주물 작업하였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이라는 공인 이름의 약자이다. 그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인물 브론즈뿐만 아니라, 청동이나 상아와 청동이 어우러진 종도 제작하였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그가 만든 브론즈에는 모두 이름을 새겨두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작품의 근원을 알 수 있으므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상아와 청동이 어우러진 그의 브론즈 종은 경매에서도 자주 볼 수 없거니와 가격도 만만치 않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최근에는 상아의 거래를 금지하는 국제협약에 의하여 오래된 예술품이라 하더라도 상아로 만든 것도 거래가 규제되고 있고, 미국 경매에서도 상아를 뜻하는 ‘ivory’라는 단어는 검색 자체가 차단되고 있으므로, 향후에는 이러한 종들을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다행스럽게 나는 그의 작품을 몇 점 수집하였다. 사진의 청동 조각품은 전체가 청동인 정장한 당시 비엔나 귀부인이나, 상아로 얼굴을 만들어 조합한 종들이다. 부인 형상의 종들이 그러하듯이 긴 치마로 된 종의 몸통 아래에 추가 들어 있다.
비엔나는 20세기에 들면서 정치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체제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유럽을 호령하던 위치에서 퇴조되며, 함스부르크 왕조의 붕괴가 일어나며 세상의 질서가 바뀌는 이 급격한 변화가 비엔나 예술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고 한다. 비엔나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오토 와그너, 콜로만 모세르 등이 중심이 되어 1897년 비엔나 예술가협회에서 독립된 ‘비엔나 분리파(제체지온)’라는 예술가 조직이 결성되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아카데미즘이나 관이 주도하던 전시회로 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였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협회 등의 기구 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자신들 만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었다.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을 통해 훌륭한 외국 작품들을 소개하여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기운을 불어 넣었다. 빈 분리파에는 특정한 예술 이념이나 양식은 없었지만 빈 분리파 전시관 입구에 새겨진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문구에서 이들이 추구한 이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술적 사조와 국적을 초월하였으며 전위미술에도 우호적이었다. 처음 인상주의와 아르 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에서 출발한 비엔나 분리파는 실용성과 상징성의 조화를 추구하여 생활과 미학을 결합시킨 총체적인 미술을 창출하고자 했다. 또한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을 통합하여 근대적인 국제주의 미술과 디자인이란 개념을 주창하였다. 필자는 ‘비엔나 분리파’를 이끌었던 클림트의 회화에서 새로운 세기로 맞이하던 비엔나 시민들이 공유하였을 활화산과 같은 강렬한 에너지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