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혈액제제 쌍두마차로 북미시장 공략
제약 CEO 프리즘(3) / 녹십자 허은철 사장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던 시절에 최고경영자(CEO)는 주로 재무책임자(CFO)의 몫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금융개혁과 시장개방으로 자금조달의 폭이 넓어지면서 재무보다 기술에 초점이 모아졌다. 기술과 경영을 아우르는 기술경영자(CTO)가 기업경쟁의 선봉이 됐고, CEO가 될 관문이 되고 있다.
새해 녹십자의 지휘봉을 잡은 허은철 사장은 40대 젊은 오너 3세라는 출신성분보다 CTO를 거친 경력이 눈길을 끈다. 지난 1998년 녹십자에 입사해 경영기획과 기획관리, 연구개발(R&D)기획 업무를 맡은 뒤 부사장으로서 CTO와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CTO 출신 사장... 연구개발 비즈니스화
녹십자가 지향하는 경영전략은 허은철 사장의 지나온 길에서 감지할 수 있다. 기술경영을 통한 연구개발의 비즈니스화로 압축 가능하다. 제약기업에서 기술은 연구개발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취임 후 처음 발표한 신년사에서 “진정한 저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저력의 근간은 백신과 혈액제제다. 녹십자는 생산과 연구개발에 비중을 두고 장기간 투자해 이들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작년 수출액은 국내 제약사 최초로 2억달러를 넘어섰다.
SK증권 하태기 애널리스트는 “국내 독감 백신의 저성장을 해외 수출로 극복하고, 수두백신 수출 증대에 힘입어 실적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며 “지속 가능한 성장구조를 갖췄다”고 분석했다. 녹십자는 새해 들어서도 범미보건기구 입찰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7500만달러어치의 수두백신 입찰 전량을 따냈다.
허은철 사장의 롤 모델도 호주의 백신 및 혈액제제 전문 제약사인 ‘CSL’이다. CSL은 인플루엔자 백신시장에서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보적인 기업이다. 현재에는 백신뿐 아니라 인수합병(M&A)을 통해 혈액제제 시장에서도 글로벌 3위권의 메이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0년간 시가총액이 20배 이상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롤 모델은 호주 CSL... 백신.혈액제제 수출 날개
허은철 사장은 CSL을 벤치마킹해 해외 시장 공략에 불을 댕길 채비다. 대표 제품은 연간 5백억-6백억원의 매출을 올려주는 면역글로불린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IVIG-SN)이다. 현재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의 예방접종 확대계획과 맞물려 이 지역에 대한 시장 공략이 활발하다. 브라질에서는 IVIG-SN 가격이 국내보다 2배 정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대 시장은 20조원 규모인 혈액제제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북미 지역이다. 허은철 사장 취임과 맞물려 북미 진출을 위한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지난 달 미국 내 여섯 번째 자체 혈액원이 들어섰고, 2020년까지 30곳을 확보할 계획이다.
북미 생산시설 기반이 될 캐나다 혈액분획제제 공장도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올 상반기 중 착공된다. 녹십자 관계자는 “연내 IVIG-SN의 미국 식품의약국(FDA) 생물학적제제 품목허가를 신청한다”고 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혈액분획제제 플랜트 수출도 수익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허은철 호의 첫 해는 순항할 전망이다. 한해 뒤 무난하게 매출 1조원 돌파의 영예를 안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녹십자가 지난 2일 공시한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은 1조원에 조금 못 미친 9753억원, 영업이익은 970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보다 9.8%, 영업이익은 23.1%나 껑충 뛰었다.
녹십자측은 “주력 제품 중 하나인 독감백신 매출이 후발주자의 등장으로 인한 실적 훼손 우려에도 불구하고 예년 수준을 유지했고, 한국MSD와 공동판매하고 있는 대상포진백신 ‘조스타박스’의 매출 가세로 백신제제 국내 매출액이 전년 대비 약 20% 늘었다”며 “세계적 독점을 깨고 출시한 헌터증후군 치료제인 헌터라제도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고 있고 글로벌 임상도 계획하고 있어 지속적인 성장이 기대된다”고 했다.
일동제약 M&A 추진? - 일동제약은 "16일까지 밝혀라" 포문
일동제약에 대한 녹십자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추진 여부도 관심사다. 일동제약의 2대 주주인 녹십자는 지난해 경영 안정화를 위한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을 무산시키는 등 경영권 개입의 뜻을 밝힌 바 있다. 잠잠하던 M&A 추진 여부는 녹십자가 지난 9일 일동제약에 주주제안서를 보내 임기가 만료되는 일동제약 이사진 3명 중 감사와 사외이사를 추천인사로 선임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열쇠는 경영권을 넘겨받은 허은철 사장이 쥐고 있지만, 독단적인 M&A 추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코넬대 출신의 해외파인 허은철 사장은 보수적이고 연공서열 중심의 조직 문화를 꺼리는 것으로 알려진데다 언론에서 회장의 의견도 반드시 관철되지 않는 견제장치가 갖춰져 있다고 말하는 등 소통 경영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M&A의 필요성은 적지 않다. 업계 일각에서는 허은철 사장이 호주 CSL을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혈액제제 시장의 파이프라인을 강화할 캐시카우(Cash Cow)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동제약에 대한 M&A가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매출 1조원에 육박하는 녹십자가 4천억원 규모의 일동제약을 M&A하면 유한양행을 넘어서 업계 1위로 발돋움하게 된다. 더욱이 백신과 혈액제제 중심인 녹십자는 일반의약품 위주인 일동제약과 품목이 겹치는 부분도 거의 없다. 일동제약의 지분 10%를 가진 피델리티 펀드가 누구와 손잡을지도 지켜볼 부분이다.
녹십자로부터 주주제안서를 받은 일동제약은 즉각 “적대적인 M&A가 아니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입장과 조치를 오는 16일까지 요구한다”고 밝히며, 공식입장을 담은 공문을 9일 녹십자에 보냈다. 일동제약으로서는 지난해 지주사 전환 반대에 이어 이번에 예고 없는 주주제안권 행사 등 일련의 권리행사가 적대적 M&A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동제약은 “이러한 형태의 주주권리행사는 오히려 일동제약의 중장기 전략 추진에 걸림돌이 되고 있고 이는 녹십자가 내세운 협력 취지에도 위배되고 있다”면서 “우선적으로 상호간의 신뢰구축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라 판단되며, 이에 대해 녹십자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일동제약은 녹십자의 주주제안을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