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비명에도 의사 표정이 차가운 이유
“의사는 왜 환자의 고통에 아파하지 않지요?”
“환자가 아파할 때 자신도 아파해야 명의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은 의사가 가슴을 열고 환자와 감정과 느낌을 공유하기를 바라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얼마나 낭만적 생각인지 금세 알게 된다. 의사가 환자와 온몸으로 감정을 공유하면 치료를 할 수가 없다. 환자의 고통이 그대로 전이될 때 어떻게 냉정히 환자의 환부를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 또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환자가 죽을 때마다 실의에 빠진다면 다시 찾아올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최근 뇌 과학의 ‘감성 공감’에 대한 연구는 의사의 뇌가 환자에 푹 빠지지 않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의사의 뇌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편함에 대해 자동적인 반응을 차단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이 능력은 ‘측두 두정정합(TJP)’이라는 곳에서 담당한다. TJP는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두뇌에서 잘 발달돼 있다. 흥분하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거나 폭행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TJP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할 수가 있다.
심리학자이자 경영사상가인 대니얼 골먼의 역작 《포커스》에서는 미국 의사 마크 히먼의 사례가 의사에게서 TJP의 발달이 필요충분조건임을 보여준다. 히먼은 인도, 부탄에서 위급한 환자를 위한 의료봉사를 마치고 아이티 지진복구를 위한 선발 의료팀에 합류했다. 포르토프랭스의 병원에 도착하니 수 백 구의 시신이 쌓여있고, 병원 정원에는 다리가 간신히 붙어있거나 몸의 절반이 잘려나간 사람 등 도움의 손길이 절박한 사람이 1500명 누워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의료봉사 활동을 다니다보면, 주변의 고통을 초월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아이티에 있을 때에는 비현실적 느낌이 들었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저는 냉정하고 침착했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느낌마저 들더군요. 지금 내가 하는 일 외에 모든 것들이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뇌신경 과학자들은 TJP가 유전적이라기보다 학습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의대생들이 인턴, 레지던트 등을 거치며 다양한 환자를 보면서 이러한 능력을 익힌다는 것.
많은 의사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레지던트 교육 시스템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오슬러는 “의사는 끔찍한 광경에 직면했을 때에도 혈관이 수축되지 않고, 심박 수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 M. 호자트 등이 ‘아메리칸 메디신’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젊은 의사들이 수련을 받을 때 환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보고서도 심리적 반응을 억제하고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 차분하고 뚜렷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도록 TJP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무한정 방치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환자 진료과정에서 컴퓨터 화면 대신에 환자의 눈을 바라보고, 환자의 일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도가 올라가 치료율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공감 및 관계 과학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헬렌 리스는 실제로 행동적 공감을 표시하면 의사와 환자의 상호관계를 보다 깊게 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우리나라처럼 ‘3분 진료’에 허덕이지 않을 미국 의사도 인간적 관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 진료가 계속 밀리게 될 것으로 걱정하지만, 리스 박사는 “공감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해준다”고 말한다.
의사는 뇌를 선택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점에서 ‘감정을 팔아버린 전문가’라고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은 의사가 자신의 고통에 무감각한 점을 별 생각 없이 비난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고통에 100% 공감했을 때 자신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는 점은 망각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 망각에 대해서도 공감해줘야 한다. 여러 모로 힘든 전문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