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승들 걷던 길 따라 추억을 깨우는 종소리
●이재태의 종 이야기(26)
캘리포니아 개척 길 ‘카미노 레알’
‘옛길’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옛길을 찾아 떠나고 있고 ‘실크로드’ ‘만리장성‘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남미 잉카의 옛길인 ‘카팍난’도 영원히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우리나라의 ’올레길’은 힐링을 위해 걷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건설되어있던 옛 도로 ‘카팍난’은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후 스페인의 관할이 되어 ‘카미노 레알’로 서구에 알려져 있다. ‘엘 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 왕의 길)’은 스페인 말로 도로(길)를 뜻하는 ‘카미노’와 왕을 의미하는 ‘레알(영어 royal)’의 합성어다. 스페인 왕과 총독의 관할 하에 있던 도로는 모두가 카미노 레알이다. 즉 스페인과 전 세계의 스페인 식민지 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도로들을 통칭하여 ‘왕의 도로’라는 뜻의 카미노 레알로 불렀다.
식민지 멕시코 광산의 은을 스페인으로 반출하던 도로는 ‘카미노 레알 티에라 아덴트로(내륙의 도로)’이라 불렀다. 많은 카미노 레알 도로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로가 지나는 지역이나 특산물 명칭을 뒤에 붙이기도 한 것이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엘 카미노 레알’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멕시코의 영토였던 시절에 만들어진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향하는 캘리포니아 개척 도로였다. 오늘날 이 도로의 많은 구간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 길을 따라 건설되었거나, 주행하는 역사적인 도로들은 이렇게 불리고 있다. 사실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의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멕시코의 도로는 더 이상 카미노 레알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옛 선교 활동이 재조명되면서 사라졌던 ‘카미노 레알’도 다시 관심을 끌었고, 옛날 명칭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역사는 ‘선교원(mission)’으로 부터 시작한다. 예수회와 프란시스코회 선교사들은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올라가며 종교적 전초기지인 선교원을 건설했던 것이다. 카미노 레알은 옛 캘리포니아에 프랜시스코회 수도승들이 개척한 21개의 선교원을 연결하던 길이다.
옛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의 카미노 레알은 스페인 개척대에 의하여 확립된 두 개의 길이었다. 처음은 1769년 후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신부의 프란체스코회 선교단들이 포함된 탐험으로 개척되었다. 세라 신부는 로레토에서 출발하여 샌디아고 근처에 첫 선교원을 설치한 뒤에는 거기에 머물렀으나, 같은 팀의 ‘포르토라’ 등은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탐험 여정을 계속하여 샌프란시스코 만까지 진출하였다.
두 번째 1775년 데 안자(de Anza)의 탐험은 남서쪽에서 콜로라도 강을 건넜고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서 앞의 길을 만나 캘리포니아로 들어갔다. 이는 내부 협곡을 지나 샌프란시스코 반도의 동부에 도달하는 비교적 수월한 길이었다. 오늘날 미국 국도 101번에 해당한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동안 샌 디에고부터 샌 프란시스코에 사이에 건설된 선교원의 목적은 이곳 원주민들을 종교적으로 교화시켜 ‘신 스페인’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선교원과 주민부락(푸에블로 pueblo) 및 요새(프레시디오 presidio)를 건설하였고, 이들 간의 통행을 위하여 ‘카미노 레알’을 개척한 것이었다. 동시에 캘리포니아 땅에 스페인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첫 선교원은 1769년 세라 신부가 설치하였고, 마지막 선교원은 1823년 캘리포니아가 미국으로 편입되기 불과 27년 전에 건설되었다. 수도승들은 매일 말을 타고 ‘카미노 레알’의 황량한 들판 길을 걸으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노새와 조랑말을 타고 하루 30마일을 기준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북쪽 소노마까지 900㎞의 거리를 나누어 21개의 선교원을 세웠다.
선교원은 예배를 위한 교회, 일터와 마당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진흙과 짚 풀로 만든 구조는 자연재해에 취약하였다. 선교원은 19세기 이후 사람들과 격리되면서 관심에서 멀어졌고, 지진으로 큰 손상을 입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유적들이 관심을 받자 여러 선교원이 복원되었고 현재는 대부분 카톨릭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18세기 신대륙으로 온 스페인 수도승들은 샌디에이고, 로스앤젤레스, 센트럴 코스트,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1,600km가 넘는 해안의 인디언마을에 기독교를 전도하며 서양 문물을 전파하였다. 스페인 제국주의 야망에 선교사들의 종교적 염원이 더해지며, 인디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 동화되어 갔다. 선교승들이 캘리포니아에 세운 선교원을 중심으로 점차 황야는 농토로 변모하고 도시로 발전하면서 오늘의 캘리포니아가 탄생한 것이다.
후니페로 세라(1713-1784)는 첫 선교원을 포함해 초기 9개의 선교원을 건설한 신부로서, 캘리포니아 개척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멕시코로 파송된 프란체스코회 신부인 그는 37세였던 1749년 당시, 다수의 수도승들과 선교를 위하여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그는 9년 동안 인디안 선교에 헌신한 후 멕시코시티로 돌아왔다. 54세이던 1767년에는 상부 캘리포니아 선교의 책임자가 되어 다시 샌디아고로 파송됐다. 그는 그곳에 설치한 선교원에 머물며 전도에 힘쓰다가 71세에 사망하였다. 그는 평생을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고통을 가하면서 자신을 경계하며 살았다.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세라신부의 전도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가 처음 인디언 부락을 방문하였을 때 주민들은 그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어느 날 역병이 돌던 지역을 방문하자 주민들은 모두 그의 방문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환자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치유를 위해 설교를 하였다. 그가 다녀간 후 세라신부의 설교를 한사코 거부하던 한 명의 환자를 제외하고, 모든 환자가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그의 전도는 원주민들의 호응을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모습은 미국의 우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는 카미노 레알을 통한 사람들의 왕래가 계속되었으나, 남북으로의 화물 및 장거리 승객의 수송은 이 길 보다는 오히려 수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국지적으로는 이 길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인 이동 통로가 되지 못하였다. 점차 그 경로가 불분명해졌으며 이에 따라서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이 길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자동차 시대가 도래 하면서 소수 부유층을 중심으로 이 길을 통해 자동차 통행이 가능한 도로망을 건설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식민지 캘리포니아가 문학적으로 ‘낭만적인 천국’,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던 지중해풍의 피정지’로 묘사되며 아름다운 그 시대를 재조명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시골 성당으로 쓰이고 있거나 이미 폐허로 변한 선교원은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관광지로 개발 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들은 ‘카미노 레알’에 강력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였고, 선교원에서 선교원으로 이동하던 수도승들의 행적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당시 이 도로는 쇠락해가던 도로였으나, 낭만적인 식민지시대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감동적인 사연이 더해지고 건축물들은 새로 단장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에는 카미노 레알의 경로를 따라 포장된 도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건설은 늦어졌고 완성된 길도 오랫동안 원시적인 모습에 불과했다. 결국 1920년대에 들어서야 고속도로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지금의 미국 101번 국도와, I-5 고속도로, 82번 국도 등은 이 길 위나 길을 따라 건설된 도로이다.
20세기 초, 시민운동가들은 이 역사적인 도로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동시에 이 도로에 특별한 표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카미노 레알 협회’가 지원하여 길을 따라 전설적인 선교원의 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이 종은 미국 여성 종 제작자인 포브스(ASC Forbes)부인이 디자인하였다. 1906년 첫 번째 ‘엘 카미노 레알 종(선교원 벨, mission bell)’이 로스앤젤레스 플라자 교회 앞에 설치되었고, 이후 8년간 이 길을 따라 1,2 마일마다 합계 450개가량의 종이 설치되었다.
‘선교원 벨’에는 ‘1769’와 ‘1906’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1769년은 샌디아고에 첫 선교원이 설립된 해이고, 1906년은 로스앤젤레스에 첫 선교원 벨이 설치된 해를 의미한다. 선교원 벨은 높이가 3.4m로, 직경 7.5cm의 금속 파이프에 지름 46cm의 종이 달린 모습이다. ‘프란체스코의 지팡이’라는 끝이 굽은 쇠막대기에 종을 매달아서 자동차 운전자들이 그 길에 있음을 표시하였다.
1920년부터 남 캘리포니아 자동차 클럽이 이 시설물을 관리하였고, 1933년 이후는 주정부가 이를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선교원 벨들은 약탈과 사람들의 인위적인 파손, 그리고 도로 코스의 변경이나 공사로 사라져갔으므로 한때는 전체 수가 80개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결국 캘리포니아 도로교통국은 1996년부터 샌디아고에서 샌 프란시스코까지의 카미노 레알의 전 구간에 550개의 종들을 다시 설치하였다. 선교원 종들은 지금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운전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선교원 벨을 제작하였던 포브스부인은 1914년 캘리포니아 종 회사를 설립하고 방문 기념품과 수집가들을 위한 미니어처 종들도 제작하였다. 선교원 벨을 복제한 28cm의 모형 종은 여행객들의 기념품뿐 만 아니라 선반이나 책상, 교실의 장식품으로 판매되었다.
카미노 레알을 보존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보며, 전국에서 물자를 나르고 과거를 보기 위하여 봇짐을 메고 한 달씩 걸어 한양으로 향하던 우리의 옛길들은 어떤지 생각해 본다. 문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과거는 또 다른 미래가 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