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의학 헌신하던 그 모습, 아직 눈에 선한데....
故 연제 서인수 선생님 영전에
지난 7일 연제 서인수(然齊 徐仁銖) 선생님이 자녀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92세를 일기로 편안히 타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한글날 제가 수원 노블카운티 자택를 오랜만에 찿아 뵈었을 때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셨습니다. 평소 좀처럼 말씀을 하지 않으시던 가운데도 저에게 “오랜만이다”라고 또렷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번 더 찾아 뵈어야지” 하고 있던 월요일 아침 비보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1923년 5월 26일 대구에서 서해석 님과 권숙양 님의 9남매 중 3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1944년 9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하신 후 대구 동산기독병원 인턴(1944. 10-1945. 8)을 거쳐 구(舊) 국립방역연구소 연구원 및 결핵부 부장(1945. 9-1950. 8)을 역임하셨습니다.
6.25 전쟁 중 입대하시어 육군군의관으로 6년간 근무(1950.12-1956. 12)하신 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16년간 역임(구 수도의과대학/우석대학교, 1957. 2-1972. 7)하셨습니다. 1959-1960년 미국 Tulane 의과대학에서 연수를 받으시고, 1961년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1972년 8월부터 한양의대에서 교수로 16년간 근무하시면서 의대학장으로 학교를 크게 발전시키신 후 1988년 8월 정년 퇴임하셨습니다. 이후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하시면서 장애우가 다니는 다니엘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펼치셨습니다.
학술활동으로는 장내세균 특히 녹농균 및 포도상 구균을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제자로 지도한 사람은 조양자, 이용주, 박성수, 이동후, 정용훈, 김정목 교수님을 비롯해 그 수가 많습니다. 대한미생물학회 회장(1964-1965, 1970-1972)과 한국의학교육협의회 회장 (1983-1984)도 역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국제연합헌장 수호공로훈장 (1955), 내각수반 표창(1963), 국민훈장 동백장(1988) 등을 받으셨습니다. 가족으로는 배화여고 교장을 역임하신 안효식(安斅植) 여사(2011년 작고)님과 슬하에 1남 2녀(임정 壬貞, 혜정 彗貞, 영표 映杓)를 두셨습니다.
장녀 임정은 이화여대에서 석사학위(사회학), 차녀 혜정은 미국 줄리어드 음대(Julliard School)와 미시간 대학에서 석.박사 박위를 받았고 아들 영표는 카톨릭의대를 졸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입니다. KAIST총장을 역임한 서남표 박사님이 선생님의 조카입니다.
선생님은 해방 직후 열악한 여건 속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결핵과 장내세균을 연구하면서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선생님뿐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해오신 모든 기초의학자분들은 후학들에게 존중받아야할 참으로 존경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동도의 길을 걸어오신 지음지기 전도기 (全燾基) 박사님은 선생님에게 대해 “스스로의 재주를 큰 인덕으로 감싸고 살아 온 드문 선비로 온화한 성품에서 늘 배운 것이 많았다.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글로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및 한양대학교에서 배운 제자들은 “언제나 강직하신 성품으로 엄격한 과학교육을 하셨으나 제자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인자함을 베풀어 주셨으며, 근검·절약과 질서 있는 시민정신을 꾸준히 실천하시면서 나라의 발전을 기약할 후진들에게 항상 일깨움을 주셨습니다(퇴임기념논문집 헌정사중 발췌).”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을 친구의 아버지로서 가까이서 뵙고, 그 인자하신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결국은 한양의대에 들어갔습니다. 또 미생물학교실 조교로 남아 1년 반을 가까이서 모셨고 퇴임 이후에도 자주 모시고 등산도 하였습니다. 어려운 고비마다 멘토인 선생님의 자상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가 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의 허락으로 미생물학교실에 입실하였습니다. 조교로서 3년간 근무하는 동안 적응을 잘 못해 몇 차례 그만두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번번이 타이르시고 “기초의학은 10년을 해봐야 제대로 할 재목인지 아닌지를 안다”고 말씀하셨지요. 아직도 귓가에 그 음성이 쟁쟁합니다.
아끼던 제자들이 미국 연수 가서 임상으로 돌아서 버린 것을 아쉬워하신 점도 기억납니다. 제가 공중보건의 때 승가사 뒤 북한산을 같이 등산하실 때도 생각납니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높은 바위 위에도 잘 올라가시곤 해서 제가 속으로 놀라기도 했지요. 등산하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제대 직전 저의 진로에 대해서 대학으로 가야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후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감염사건으로 소송에 걸렸을 때 저는 가장 먼저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좀 수고스럽더라도 법원의 판결을 받도록 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80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지인 서O우 변호사를 찾아 가시어 도움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 새삼 기억에 납니다. 정년퇴임 하신 후 저에게 소장하신 서적들을 주시려고 하셨지요. 제가 수시로 이사 다니는 처지에 감당할 수 없어 책을 받을 수 없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 자그마한 보은이라면 1987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생님에 대해 동기들에게 설명을 하여 선생님이 “올해의 스승”으로 선정되시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외국여행을 한번 모시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제가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송사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생사일여, 문막을 지나는 길에 충효공원에 종종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선생님 편안한 안식을 누리소서.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미생물학교실 교수 조영걸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