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찾아... 산티아고로 가는 길
●이재태의 종 이야기(20)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길 (El Camino de Santiago)
프랑스의 남부 도시 생장피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하여 피레네산맥을 가로지르는 800km의 길을 한 달 이상 걸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에 도달하는 성지 순례길이 갑자기 유명해졌다. 지금부터 직장에서 은퇴해 인생 제 2막을 시작해야 하는 나 같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남은 일생에서 우선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버킷리스트) 가운데 이 길을 홀로 걷는 것을 높은 순위에 두고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열광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마침 유럽갑상선학회 학술대회가 그곳에서 개최되기에, 어렴풋하게나마 그 근처의 냄새라도 맡아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일반적으로는 북부 길 800km가 잘 알려져 있으나, 유럽 각지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던 순례길은 실로 다양하다.
다음의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다양한 방향으로 걸어 대성당의 ‘순례자의 미사’에 참석한다.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 길거리에서 만났던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은 포르투갈의 포르투에 도착해 10일을 걸어 대성당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의 공식적인 끝은 여기서 다시 출발해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북대서양 끝의 피니스테레(Finisterre)로 가야한다. 이 곳에서 순례자들은 대서양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그 동안 자신이 입었던 낡은 옷을 불태우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출발함으로서 순례가 완성된다고 한다.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El Camino de Santiago)는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도시로,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가톨릭의 3대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산티아고(Santiago)는 야고보(Jacobo) 성인의 라틴어 표현인 'Santucs Iacobus'를 스페인 갈리시아어인 'Sant Iago'로 옮긴 말에서 유래하였고, 야고보 성인의 스페인어식 표현이다.
야고보 성인은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중 한 명으로 세베데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복음서를 쓴 요한 성인의 형이다. 예수의 12제자 중에는 요한의 친형이었던 큰 야고보와 알페오의 아들인 작은 야고보의 두 야고보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큰 야고보를 말한다. 야고보는 예수의 부름에 처음 응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며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 전 세계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났던 다른 제자들처럼 야고보도 전도를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갔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전도는 별 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한다. 7년 뒤에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한 채 기독교인들이 모진 박해를 당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팔레스타인 포교가 큰 성공을 거두자 분노한 유대인들은 그를 붙잡아서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서기 44년 유대의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명령으로 참수돼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아타나시오(Atanasio)와 테오도로(Teodoro)라는 두 젊은 제자들은 참수당한 그의 유해를 훔쳐 배에 실었고, 7일간의 항해 끝에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상륙했다. 이때 천사들이 나타나 물길을 안내하고 육지에 도착한 그의 유해는 조개껍질들이 둘러싸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가리비 조개껍질은 야고보 성인과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은 순례길의 곳곳에서 순례자를 인도해주는 표지판으로 쓰이고 있다.
야고보의 유해는 바위 위에 우선 안치되었으나, 이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루파 여왕을 찾아가서 묘지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여왕은 그들에게 먼 산을 가리키며 저 산으로 가서 야생 황소들을 찾아내고 소에 수레에 매달아 성인의 관을 싣고 가서 적당한 장소에 묻으라고 했다. 사실 여왕은 그들이 이 야생 황소들을 길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말을 한 것이었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황소를 길들여 관을 매달고 산으로 들어가자, 분노한 여왕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병사들이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여왕은 마침내 모든 기적을 인정하고는 스스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야고보의 유해를 자신의 궁궐의 성벽 내부에 묻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 7백 년의 세월 동안 야고보 성인이 묻힌 정확한 위치는 잊혀 진다.
813년에 은둔 수도자인 펠라지우스는 인적이 드믄 벌판에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는 신비한 자연현상을 목격한 후, 꿈속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묻힌 장소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 그는 테오도미르 주교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그와 함께 들판 위에서 반짝이는 신비로운 별의 인도를 받아가며 묘지를 찾으러 떠났다. 두 사람은 허물어진 예배당 내부에서 참수당한 유해 한 구를 포함한 3구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발견했다. 주교는 이것이 야고보 성인과 동행자인 아테나시오와 테오도르의 관이라고 확신했다. 주교는 그 지역을 지배하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에게 보고했고, 왕은 직접 현지를 둘러본 후 무덤 위에 성당 건립을 명령했다.
야고보의 무덤 발견을 계기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건립됐고,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콤포스텔라는 명칭이 ‘묘’를 의미하는 라틴어인 콤포지툼(compositum)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별빛이 쏟아지는 들판(Campo de las estrellas)’이라는 의미의 'campus stella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때에는 민족의식이 희박했던 스페인 사람들의 정체성이 확립되던 시기였고, 기독교도들인 유럽 국가들이 연합해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며 결속력을 다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으로부터의 국토수복 전쟁은 기독교 국가들로서는 성전(聖戰)이었는데, 이 소식은 스페인 군대와 국민을 더욱 단결하게 했고 야고보는 스페인 수호성인으로 자리 잡는다. 전설에는 야고보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무어족 군대를 무찔렀다. 이때 열세에 있었던 전투에서 울려 퍼졌던 “산티아고, 돌격하라, 스페인이여(Santiago y cierra, España)”라는 구호는 이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스페인 군대의 정식 공격명령으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야고보 성인은 ‘마타 모로스(무어인을 죽인다는 뜻)’로도 불리게 되었고, 신대륙 정복 시에는 ‘인디오들을 물리치는 산티아고’의 모습으로 바뀌어 스페인 병사들을 독려하는 수단이 됐다.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유럽으로 전해졌고, 당시의 교황 레오 3세는 이를 모든 그리스도 국가에 중요한 사건이라고 공표해 야고보의 명성은 기독교 세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무어족이 남쪽으로 밀려나던 12-14세기에 이르러 콤포스텔라는 절정기를 맞게 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드로 3세가 이곳을 로마, 예루살렘과 더불어 ‘거룩한 도시’로 명명하고 갈리스토 2세 교황은 로마 가톨릭교회 ‘최고 성지’의 영예를 부여했다. 특히 614년 예루살렘이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당해 그리스도교도인의 순례길 통행이 차단되자, 산티아고에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모여들게 된다. 갈리시아 지방은 일약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야고보의 유해가 진짜인지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학자들은 갈리시아 지방에서 3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유적이 발굴된 바가 없으며, 유해가 발견된 장소가 켈트족, 로마, 수에브족, 서고트 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유해가 매장된 공동묘지였으므로 무덤의 진위와 야고보의 생전 전교 활동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아스투리아스 왕가가 야고보의 무덤을 서둘러 승인한 것도 당시 이슬람 지배하의 톨레도 교회에 대한 반감과 코르도바를 근거지로 했던 이슬람 왕조에 대한 적대의식, 그리고 성인의 무덤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로부터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욕구 등 정치, 외교적인 이유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이미 9세기 후반부터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1122년 교황 칼리스토 2세가 산티아고의 무덤을 공인하게 되면서 유해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 됐다. 하지만 이 또한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이슬람세력에 의해 예루살렘 순례길이 차단됨으로써 대체 성지의 필요성이 절박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합리적인 근거에 의한 공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교황 알레한드로 3세는 야고보의 축일인 7월 25일이 주일에 해당하는 해에 산티아고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보속을 면죄받는 전대사(全大赦)를 받을 것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로서 성년(聖年) 야고보 성인의 축일인 해가 되면 무려 5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성인의 무덤을 향해 걸었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고립되어있던 스페인이 유럽과 연결되고 개방되는 문화와 기술 교류의 길이자 상품교역의 길이 됐다. 유럽의 사람들은 이 길을 통행하며 서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며 그들이 가진 과학과 의학, 철학 지식을 교환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다.
순례길을 따라 도시와 마을이 세워졌고, 강을 건너도록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크고 작은 성당들이 건립됐다. 순례자들과 여행자들, 극빈자들을 받아들여 치료해주기 위해 병원도 문을 열었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콤포스텔라 순례길은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영향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전쟁의 영향으로 거의 잊혀지게 된다. 이때는 스페인 영토 회복이 이미 이루어졌고, 백년전쟁에 이은 16세기의 종교전쟁이 발발하면서 순례자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것이 매우 위험해졌다. 또한 왕들은 순례자들을 보호해주는 임무를 띤 전투교단들이 너무 비대하고 강력해 자기들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수도자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개척하기 시작했으나, ‘산티아고의 순례길’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0년 대 부터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사람들은 보다 깊고 새로운 그 무엇을 추구하기 위하여 ‘산티아고의 길’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례길이 있는 도시나 마을, 그리고 가톨릭 교구에서도 순례자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설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1982년대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문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으며 1993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찾는 문화관광지, 정신적 중심지가 됐다. 1986년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순례한 뒤에 쓴 소설들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우리나라에게도 낯설지 않은 곳이 되었다. (두 개의 스페인, 신정환, 전용갑 저, 2011년, Hufs Books)
필자도 짧은 거리이나마 순례길의 끝부분 몇 km를 걸었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했다. 종교가 없는 필자가 라틴, 이태리 말씀으로 전하는 신부님의 복음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뜻은 짐작하는 그대로 일 것이라 생각해 봤다. ‘오랜 산길을 홀로 걸어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서 눈물지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에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이 순례의 의미이다’라는 최윤희 시인의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의 마지막에는 5-7명의 수사들이 밧줄을 당기면 천장에 달린 채로 앞뒤로 진자운동을 하는 커다란 향로에서 향이 퍼져 나오는데, 그 옛날 초췌한 순례자들이 내뿜던 고약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시작했다는 분향은 지금은 그 자체가 장엄한 의식이 됐다.
산티아고로 계속 걸어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걷는 내적인 항해이며, 현대인에게 이 길은 "도보여행자로 떠났다가 순례자로 돌아오게 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여행은 처음 출발할 때는 산행처럼 느껴지지만, 며칠이 지나거나 어떤 시련을 겪게 되면 자기의 내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다른 차원 속으로의 여행이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