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달리던, 강인하고 자유로운 영혼들
●이재태의 종 이야기(19)
노마드(Nomad) 베두인 민족
21세기에 들어서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신인류를 뜻하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란 용어가 화두가 됐다.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에 디지털이 앞에 더 붙었다. 인터넷과 최첨단 정보통신기기를 지니고 사무실을 별도로 두지 않고, 세계를 경계 없이 드나들며 활동하는 인간형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가 21세기형 신인류의 모습인 ‘디지털 노마드’를 소개하며, 정보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정보와 지식이 중심인 디지털시대에서 자신의 삶의 질을 극대화하기위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고, 그들은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면서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측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방식에서는 유목민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인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처와 그들 삶 전체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정확한 정보력, 그리고 개인이 지닌 능력이 개인과 집단의 성공여부를 결정할 시대가 된 것이다.
유목민(遊牧民, Nomad)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식량이나, 동물을 사육할 수 있는 목초, 그리고 삶에 필수적인 물품을 찾아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계에는 3~4,000만 명의 유목민이 있고, 이들은 주로 가축을 이용하거나 도보로 이동을 한다. 유목 생활은 농경생활에 비해 항상 불안정하고 어려운 자연환경 속에서 여러 곳을 옮겨 다니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에 적합한 생활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각 나라들의 국경이 고정되고 다른 나라로 들어갈 때에는 여권, 비자가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유목을 그만 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목민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계절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식물이나 사냥감을 찾아 떠다니는 수렵-채집형 유목민(hunter-gatherer)이다. 산업화된 국가에서 흔한 소요형 유목민(peripatetic)은 동물을 사냥하고, 야생 과일, 채소 등 기타 식물을 채집하며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 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유목민은 한 지역에서 소, 말, 양, 염소 등을 기르며 생활하다가 먹이가 고갈되면 가축과 함께 이주하는 목축형(pastoralism)이다.
유목민이 문헌 속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등장하는 스키타이 민족이다. 스키타이는 당대 최고의 페르시아의 군대와 알렉산드로스의 북방 원정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역사에 등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유럽을 정벌하고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 징키스칸의 몽고족도 불과 100여년 지속한 뒤 다시 북쪽 초원으로 사라졌다.
유목민은 대부분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이들은 역사를 가지지 못한 ‘차가운 사회(Cold Society)’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유목민에 대한 시각과 그들의 역사는 대부분 그들과 인접한 문자를 가진 정주 사회가 남긴 역사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기에 유목민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연구가 쉽지 않으며, 정주민의 기록에는 그들의 유목민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담겨 있다.
사실 유목민들에 대한 이미지나 생각은 늘 축소되거나 과장되는 등 이중적인 시각이 내포되어 있다. ‘고결한 야만인’이라는 루소의 말처럼 유목민들의 삶을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해 자유롭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한편, 그들이 정주민들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폭력적인 이미지도 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들 역시 정주 사회처럼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생존을 위해 사회구조와 사고를 변화시켜 왔고, 유목민의 폭력성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저, 이경덕역, 시루 출판사)
항상 유랑하던 유목민들은 모여서 국가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농경민족의 변방 정도로 취급당했는데, 동양의 유목민족이었던 말갈, 거란, 여진, 몽골, 흉노, 선비 등은 모두 중국역사에서는 오랑캐로 분류됐다. 이들은 말에 익숙한 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았고 약탈 민족의 특성을 보였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면 엄청나게 강해졌다. 게르만을 서쪽으로 밀어서 서로마의 멸망을 유발한 훈족이나 요, 금, 원,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유목민족 국가의 건립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유목생활을 하는 그들이 확보한 영토는 넓었지만 농경민족이 이미 풍요한 땅을 차지한 상황에서 그들의 영토는 변방에서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었다. 인구수나 문화면에서도 정착한 농경민족의 국가와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전성기 몽골의 인구도 300만이 넘지 않았다.
그들은 유목생활로 생존에 필요한 단백질은 얻을 수 있었으나 탄수화물을 얻기 위해서 정주민을 약탈해야 했다. 농경민족은 방어선의 확립이나 왕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외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이들은 생존을 위한 침략과 약탈을 위한 것이기에 전투력이 높았던 것이다. 농경민족들은 그들을 야만스런 짐승같이 봤지만 유목민들은 정주민들을 ‘줄에 묶인 가축’과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유목제국은 몽골이 쇠퇴한 15세기 서구가 득세하기 전까지 항상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유럽제국이 총과 화약을 들고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세상을 움직여왔다. 유목제국이 성립됨으로써 동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세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국가를 건립한 후에는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된 경우가 많았다. 몽골뿐만 아니라, 동로마를 멸망시킨 투르크족도 아랍과 페르시아 족에게 동화되어 역사의 중심에서 사라지며, 모두 흔적으로만 남았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막에서 낙타를 몰고 유목생활을 하며 생활하는 베두인 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황동 종은 아라비아 반도사막의 노마드 베두인의 모습이며, 1900년 전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어깨에 소총을 맨 상태에서 그의 왼손은 야자수 나무를 잡았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들었다. 종의 몸체에는 낙타와 말을 타고 이동하는 이들의 일상생활이 양각되어 있으며, 아래 부분에는 여러 종류의 꽃잎으로 장식된 청아한 소리가 나는 종이다.
베두인족은 중동의 사막지대에 살면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족으로 시리아, 요르단, 이란, 아라비아, 아프리카 북부의 건조지대에 약 300만이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목축을 하고 있으며 겨울 우기에는 사막지역으로 이동하며 다니다가 여름 건기에는 경작지역으로 되돌아가서 생활한다. 베두인은 아랍어 바드우(badw)를 프랑스인이 발음을 잘못 옮긴 것이라고 한다. 바드우는 바디야(badiyyah, 도시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인데 오아시스나 와디(마른 강)에서 농업을 하는 사람을 총칭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인 하다르(ḥaḍar)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아라비아반도의 남단에서 농경지 개발이 한계에 달하자 농경을 하던 일부의 용감한 사람들이 경작이 불가능한 바디야로 가축을 데리고 북상해 갔는데, 그것이 베두인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베두인이라는 호칭에는 높이 자랑할 만한 용기 있는 사막민족이라는 의미와 도시의 문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반 정착생활을 하면서, 목축과 농경을 하는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바드우’라고 불러지나, 일반적으로는 동물을 사육하며 이동생활을 하고 있는 아랍계의 유목민을 베두인이라고 부른다.
성경 속 아브라함 시대부터 역사의 족적을 남기고 있으나, 베두인의 역사는 2000년 전 야생낙타를 길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베두인은 삶의 많은 부분을 낙타에 의존하며, 베두인의 부(富)는 몇 마리의 낙타를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베두인족은 그들이 소유한 동물의 종에 따라 계급이 구별된다. 이들에게는 6종의 카스트가 있다. 사막에 가장 가까이 살며 낙타를 사육하여 이동수단이나 식육, 유제품으로 이용하는 아랍의 유목민 종족이 가장 존경받는 높은 계급인데 아라비아, 시리아,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족이 여기에 속한다.
낙타를 이용한 베두인 거상은 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교역로를 만들었고, 바다길이 열리기 전인 14세기까지 번영하였다. 다음은 주변지역에서 소, 양, 산양을 방목하는 부족이다. 최하위 계급은 유목을 하지 않고 농경에 종사하는 아랍의 여러 민족과 베르베르 종족이며, 사하라 남부나 수단에는 흑인의 농노와 노예, 천민들도 있다. 노예는 아랍의 노예사냥에서 잡혀온 남유럽의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단의 흑인에만 국한되었다. 베두인 족은 베르베르인, 흑인에 이슬람교를 전파시켰고, 농경에 종사하는 종속민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을 약탈하거나 보호하고 재물을 챙기며 세력을 넓혔다. 카스트제 사회는 정복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가 아니면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복장과 풍습에서 독특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사막에서 기르는 부족의 공동 재산인 낙타와 양의 젖으로 만든 버터와 치즈, 그리고 골짜기에 모인 빗물을 이용해 재배한 밀로 만든 거친 밀가루 반죽의 둥근 빵에 대추야자를 먹는다. 결혼식이나 절기 때에는 가끔 특별한 메뉴로 고기를 먹는다. 이들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며, 부족장인 셰이크(sheikh)는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베두인족 사회는 일부다처제, 대가족제도, 부계 혈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셰이크는 남자 연장자들로 이루어진 장로회의의 도움을 받는다.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은 양과 염소의 털로 짠 검정색 텐트(털의 집)를 사용한다. 텐트의 천은 열의 발산을 돕기 위해 느슨하게 짜며, 우기에는 털실이 물에 부풀어 오르며 구멍을 막아 비가 새지 못하게 한다. 텐트와 가축 및 가재도구들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며, 하나의 텐트에는 한 사람이 주부의 일을 맡아 한다. 우물은 씨족의 소유이고 이동이나 숙영 시에는 씨족 전원이 협력한다. 베두인들은 노래와 가무를 즐기며 사막에서 만나는 손님에 친절하고 관대하여, ‘아들을 죽인 살인자라도 손님이면 지극정성으로 대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씨족사회가 지속되었던 아라비아 반도가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하나의 나라로 아래 뭉치게 되자, 상대적으로 베두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베두인들은 좀처럼 이슬람화 되지 못하는 무리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중동의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베두인의 삶은 또 다시 엄청나게 변하게 된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부족 내부의 반목과 중앙정부의 영향력 증대로 변경부락에 대한 약탈을 할 수 없었고, 그들이 이동하는 지역은 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유목이 어려워졌으므로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수단으로 하는 정착 농경민들이 증가했다. 195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는 이들의 영토를 국유화했으며 요르단은 염소 목축을 극히 제한했다. 결국 농경을 위시한 다른 육체 노동을 천시해 왔던 베두인 민족들도, 대부분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것이 수치스럽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군대 복무와 건설, 공장 일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은 강인하고 단결도 잘 되며, 부족 전원이 힘을 합하여 외부의 적과 싸워왔다. 제 1차 대전 후 리비아를 침입한 이탈리아군은 베두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20년 동안 리비아 주둔군 사령관이 7명이나 교체하며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은 후에야 베두인들을 격파하고 지도자 무스타크 오마르를 처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라비아 로렌스’는 베두인족의 특성인 혹독한 환경에서도 잘 버텨내는 이들 부족의 인내심과 강인한 근성을 잘 나타낸 영화다. 그들은 낙타 부대를 이끌고 죽음의 사막을 건너 난공불락의 요충항인 아카바 요새 기습에 성공한다. 영화의 주인공 로렌스는 신과 베두인족들만이 사막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하였고, 지독한 기후와 지리적 환경에서의 적응력은 에스키모와 베두인족을 당할 종족이 없다는 말이 있다.
유목민 투아레그인 들은 ‘정착민들의 누에고치인 집이, 산 자들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크 아탈리는 ‘정착생활은 인간 역사에서의 짧은 괄호에 불과하다. 인간은 삶의 본질 속에서 유목생활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다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하였다. 날로 각박해지는 오늘날, 현대인들은 다시 유목민들의 자연에 순응하며 자유롭게 에너지를 발산하며 살아가는 삶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시 그들의 삶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