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마다 손바닥 보듯 지형 파악... 전술 구사

전투마다 손바닥 보듯 지형 파악... 전술 구사

 

장정호의 충무공 톺아보기(8)

지형지물의 정확한 파악과 이용

맹자는 ‘천시는 불여 지리요 지리는 불여 인화(孟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하였다. 이를 사업상의 마케팅에 적용해 본다면 ‘타이밍은 외적 환경의 중요성 보다 못하고, 외적 환경의 중요성은 내부 역량의 중요성에 미치지 못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순신의 탁월했던 공간 파악 역량은 기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1580년, 36세의 이순신은 발포 만호로 있었다.

‘그때 감사 손식이 참소의 말을 듣고 공에게 벌을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가 순행차 능성(綾城)에 이르러 공을 마중 나오라고 불러내서는 진법에 관한 책의 강독을 끝내고 나서 공에게 진형(陣形)을 그려보라고 시켰다. 공이 붓을 들고 매우 정연하게 그리니, 감사가 꾸부리고 한참을 들여다보고는 말하기를, “어쩌면 이렇게도 자세하게 그리는가.”하였다. 그리고는 조상이 누구인지 물어보고 말하기를 “내가 진작 몰라보았던 것이 한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지리를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명량해전을 꼽는다. 하지만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지리의 중요함을 인식하지 않은 전투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거제도는 산세가 험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붙이기 어려울뿐더러, 당시 우리는 적의 소굴 안에 있는데다 배에 사부조차 없으면 혹시 뒤로 포위당할 염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날도 이미 저물어 뜻대로 하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와 머물면서..’(옥포파왜병장 )

‘뿐만 아니라 저들은 높은 곳에 있고 우리는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세(地勢)가 불리하고, 날도 저물어 가고 있었으므로, 신은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기를 “저놈의 적들은 그 태도가 극히 교만하므로 만약 우리가 짐짓 물러난다면 저놈들은 틀림없이 배를 타고 따라 나와 우리와 싸우려 할 것이니, 우니는 저놈들을 큰 바다로 끌어내어 공격하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였다.’(당포파왜 병장)

'뿐만 아니라, 양산강 일대의 지세가 협착하여 겨우 배 하나가 들어갈 만 한데다가 적선들이 연이어 정박해 있으면서 이미 험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려고 하면 적들은 싸우러 나오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물러나려고 하면 도리어 우리의 약점만 보이게 될 것이며, 만약 부산을 향해 가려고 한다면 양산에 있는 왜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우리의 후미를 포위할 것인데, 다른 도에서 온 객지 군사들이 터전도 없이 적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앞뒤로 적을 맞는다는 것은 실로 만전의 계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서로 부딪쳐서 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왜적들은 만약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사이에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도 없고, 혹시 뭍으로 올라가더라도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견내량 파왜 병장)

1598년 정유년 9월 16일에 있었던, 12척의 전선으로 130여척 (앞에서 언급한 이분의 ‘이순신 행록’에는 300여척으로 기술되어 있다)을 맞아 승리한 명량해전은 한글로 하면 ‘울돌목’이 되는 명량에서 치러진 해전이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남겼다.

‘15일 계묘.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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