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할 말 없나? 태산처럼 진중하라”

“더 이상 할 말 없나? 태산처럼 진중하라”

 

장정호의 충무공 톺아보기(7)

소통의 중요성

다음은 임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의 첫 출진까지의 과정을 난중일기와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 나와 있는 이순신의 장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필자가 더한 부분은 단 한 줄도 없다. 다만 시간 순서로 배치만 새로이 하였을 뿐이다.

4월 15일(일본군 부산포 도착 2일후) : 이순신은 영남 우수사 원균과 영남 좌수사 박홍으로부터 각각의 통첩을 받는다. 원균에게서 왜선 90여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닿았다는 소식과 박홍으로부터는 왜선 350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즉각 장계를 띄우고 순찰사, 병마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그 왜선의 출현이 곧 침략의 시작이란 점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무역선이라고도 보이지만 왜의 침략일지 모르니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왕에게 올린 장계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보고의 내용에 맞게 관내 10개 기지에 비상령을 내리고 전라 감사와 병사, 전라 우수사 등에게도 알렸다.

4월 16일(일본군 부산포 도착 3일 후) : 이순신은 영남 우수사 원균이 보낸 공문을 통해 부산진이 함락된 것을 알게 된다. 이순신은 다시 장계를 올리고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지역을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비상령을 내리고 장비의 점검 등도 지시하였다.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 이순신은 상기의 보고서대로 자신의 지역 방비에 만전을 기하는 임무에 충실하였다. 순찰사가 발포 권관이 파직되었으니 임시 책임자를 정해달라는 요청에 나대용을 정해 주고, 영남 우수사 원균, 영남 우병사 김성일 등으로부터 전쟁의 상황에 대해, 주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소식과 일본군의 강성함에 관한 내용이 담긴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순시와 점검을 반복하였다.

4월 20일-22일: 4월 20일 이순신은 전라 관찰사 김수의 공문에 전라 좌수영의 전선이 경상도에 와서 도와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때부터 어느 정도는 지원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정의 정식 명령 없이 자신의 방어지역을 군을 이끌고 이탈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식적이지 않다. 이순신은 이 소식만 접한 채 계속 지역 방비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전쟁 소식이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민심과 군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순신은 군의 기강이 해이하거나 교란되는 일 등 부정한 일을 적발하기위한 노력과 정보 수집의 노력도 동시에 기울였다.

4월 22일: 임금이 보낸 공문 형식으로 경상도와 의논하여 전쟁에 대처하라는 유서를 받지만 그 내용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그 모호한 문장의 표현에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조정의 지시서에 ‘조정은 멀리 있어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의 주장(主將)의 지휘에 일임한다.’라는 문구에 대해 ‘...중략... 그러나 신은 주장의 한 사람일 뿐이므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라 겸 관찰사 이광, 방어사 광영, 병마절도사 최원 등에게도 지시문의 내용을 낱낱이 설명해 주는 한편, 경상도 순변사 이일, 관찰사 김수, 우도 수군절도사 원균 등에게도 그 도의 물길 사정과, 수군이 모일 장소와, 적선의 수와 그들이 현재 정박해 있는 곳, 그밖에 여러 가지 전략에 관한 일들을 전부 화답을 급히 해 달라는 내용으로 공문을 띄웠습니다....후략...’이라고 그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부지런히 해나가고 있었다.

4월 27일: 이순신에게 조정으로부터 공문이 다시 왔다. 이번엔 비로소 명확한 경상도로의 군사 출동을 명령하는 조정이 유서에 대한 장계에서 말하고 있다.

이순신은 이 조정의 공문에 경상도로 구원을 나가겠다는 답신 성격의 장계를 바로 올렸다.

그는 27일의 조정으로부터의 유서 때 바로 명령을 내려 29일까지 본영에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다만 보성과 녹도 같은 곳은 오는데 3~4일이 걸리므로 그들이 당도하는 대로 출발하기로 하고 29일 가까운 곳부터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4월 29일 : 긴급회의: 29일 모인 장수들과 참모들을 중심으로 최종 회의를 하였다. 싸우러 나갈 것이 나은지, 전라 좌수영의 구역을 지키고 있는 것이 나은지에 대한 최종 판단을 위해서였다. 양측의 의견이 있었고 부하들이 말하는 의견을 모두 듣고 나서 이순신은 첫째, 경상도 쪽의 왜의 해군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전에 이를 미리 저지해야 한다는 점, 둘째, 왜군이 이미 한성 함락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미 본국이 모두 망하고 만다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음을 이유로 결국 출진을 결정하였고 더 이상 부하들의 이견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우선은 의견을 듣고 다시 이에 대해 중론을 모으며, 내려진 결론에 따르게 하는 절차를 통해 이순신은 부하의 마음과 군의 기강을 함께 얻어 나갔다.

4월 30일-5월1일: 4월 30일과 5월 1일 아침까지 걸쳐 실제 전라 좌수영 휘하 수군은 모두 집결했다.

5월 2일: 바다로 나아가 진을 치고 각 장수들의 결의를 다졌다. 방답의 첩보선(첩입선) 세척이 돌아왔다. 이를 통해 남해 등 앞으로 나아갈 출진길의 정보를 접수하였다.

5월 3일 : 이순신은 도망자를 처형했다. 사실 공포를 가지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미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 지역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민심은 흔들리고 군의 사기도 이 공포의 전염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도망자가 생겼다. 이순신은 그 도망자를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들 앞에 내어 걸었다.

한편으로는 이순신은 만반에 만반을 기하고 싶었다. 앞서 언급했던 경상 우수영, 좌수영이 보내온 정보로 보아, 일본 전선의 수는 최소 400척이 넘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비한 병력이 28만 명이고 다시, 이 28만 중 1차 출진 부대의 규모가 15만 8800인이고 그 1차 출진 부대의 1번 대인 고시니 유키나가의 부대 18,700명이 타고 온 선박의 수는 700여 척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 측 기록이니 임란 개시 당시 조선의 여러 기록들에 400여척, 500척, 1000척이라는 여러 가지 기록 등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이순신은 수백 척의 규모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전력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전력 규모는 판옥선 24척, 협선(중선)15척, 포작선(소선) 46척으로 총 85척이었다. 1차 출진의 전라 좌수영 산하 총 병력 15000명 중에 5000여명을 선발하였다. 어림으로 보아도 적선 수백 선을 감당할지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전 병력을 데려가지 못한 것은 전라 좌수영 전체를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우후(부관) 이몽구를 남겨 두어 방어를 든든히 해 두어라고 일러두었다.

이순신은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아군 전력의 보완을 위해 전라 우수영의 부대도 합류하길 요청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라 우수영의 준비가 잘 안되었는지 합류하기로 한 이억기의 부대는 사흘을 기다려도 기별이 없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먼저 출진하기로 한다.

5월4일 새벽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함대는 출진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일러두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태산처럼 진중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이순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선 42여척을 부수고, 약 4000여명의 왜군들이 사망 또는 다쳤지만 아군 측 전선의 피해는 단 한 척도 없었고, 사망자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순신은 소통의 중요성을 안 장군이었다.
군은 비록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생명으로 하지만 그 상명(上命)의 명이 결정되기까지 혹은 그 명이 결정되는 과정에 이순신은 회의를 하거나 부하에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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