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끄덕이는 위암-초기임상 분야 ‘천재의사’
“국제학회에서 발표하던 일본 의사가 방영주 교수가 손을 드니 반사적으로 흠칫 물러서더군요. 통계 오류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설마’하고 확인하니까 방 교수가 정확히 짚은 것으로 드러났어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천재이죠.” -서울성모병원 내과 김동욱 교수
“방영주 교수는 한마디로 천재입니다. 우리 의료 환경이 좋아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만 있다면 노벨상을 받을 재목인데….” -김성진 전 미국 국립보건원 수석연구원
의료계에서 ‘천재 의사’로 불리는 서울대병원 방영주 교수(60)는 위암 및 초기 임상시험 연구에서 ‘세계적 고수’로 인정받고 있다.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 란셋 등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3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매달 2, 3번 해외에서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하거나 자문회의에 참석한다. 국제 학계에서 방 교수의 스케줄을 최우선으로 회의 일정을 잡는 일이 적지 않다.
온갖 잡기 즐기며 즐기며 서울의대 2등 합격...수석졸업
그는 학창시절까지 ‘공부벌레’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기중학교 1학년 때 성적표는 ‘하하하’였다. 60명 중 40~60등에게는 점수 대신 ‘하’를 줬는데 원체 놀기를 좋아해서 성적표가 화려했던 것. 책상에 앉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경기고 2학년 때 반에서 2등을 했다. 바둑 3급에 축구, 야구에다 포커까지 즐기면서도 ‘궁둥이와 의자가 들어붙어야 갈 수 있다’는 서울대 의대에 2등으로 입학했다.
의대 예과 때에는 주전공이 포커, 부전공이 당구·테니스 등이었다. 본과 때에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해 캠퍼스에 대항전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절절 매는 생화학, 병리학 등의 과목에서 압도적 성적을 내고 수석 졸업했다.
방 교수는 의대 3학년 때 미국 미네소타대병원 교환교수를 마치고 귀국한 미남 교수가 동료 교수, 전공의, 학생 등 100여 명 앞에서 암 컨퍼런스를 이끄는 것을 보고 홀딱 반했다. 그 교수는 당시 ‘천재 교수’, ‘의료계의 신사’로 불렸던 김노경 교수였다. 방 교수는 인턴 과정을 마치면서 김 교수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고, 스승은 흔쾌히 승낙했다.
항암제 임상시험 본격 전개... 국내 신약 개발 토대 닦아
1987년 스승은 제자에게 “우리도 이제 임상시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사제는 국내 최초로 LG생명과학(당시 럭키 의약품사업부)이 개발한 백혈구 수치를 높이는 약을 가지고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임상시험’을 전개했다. 방 교수는 이후 SK제약의 선플라, 종근당의 캄토벨, 삼양사의 제넥솔 등 국내 항암제의 임상시험을 이끌며 신약 개발의 토대를 닦았다.
방 교수는 국내에서 내공이 쌓이자 국제무대로 눈을 돌렸다. 2005년 벨기에의 에릭 반 쿠셈 박사와 함께 24개국의 140여 병원에 있는 전이된 위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로슈의 허셉틴과 기존 항암제의 병용요법에 대한 임상시험을 실시해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2009년에는 화이자의 수니티닙이 스티브 잡스의 생명을 앗아간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2010년 방 교수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USA투데이 등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 집중조명을 받았다. 미국임상종양학회에서 발표한 화이자의 폐암 표적항암제 크리조티닙의 효과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 때문이었다. 이 연구는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됐고 방 교수는 아시아 의사 최초로 총회에서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세브란스병원 외과 노성훈 교수와 함께 국내 21개, 중국 타이완 등 해외 16개 병원 환자들 대상으로 위암 수술 뒤 보조항암요법이 암의 재발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해서 미국임상종양학회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도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됐다.
이들 임상시험은 모두 세계 각국의 의사가 표준으로 삼는 치료 지침을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세계 언론에서 잇단 소개...국내외 각종 상 휩쓸어
방 교수는 임상시험뿐 아니라 국내 연구 환경 구축에도 큰 발자국들을 남겼다. 대한암학회 이사장을 맡아 학술지를 국제학술지에 등록하는 작업을 이끌었으며 대한암학회를 의사 1000여명이 참가하는 국제학회로 승격시켰다. 그는 서울대병원 임상시험센터의 ‘보스’로 정부의 글로벌 선도센터,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의 ‘지휘자’로 연구중심병원에 각각 지정되도록 했다.
이 천재를 학계에서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는 보령학술상, 보건산업기술대상 대통령상, 바이엘쉐링 임상의학상, 김진복암연구상, 고바야시재단상, 지식창조대상 등 숱한 상을 받았다.
그는 환자에 대한 꼼꼼한 진료 설계와 실행으로 정평이 나있다. 1986년 32세에 교수가 될 무렵에는 입원 환자만 100여 명을 볼 정도로 환자에 묻혀 살아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생활을 했다. 요즘엔 ‘훌륭한 제자들’ 덕분에 환자 수는 줄었지만 연구와 관련한 각종 모임 때문에 별을 보면서 퇴근한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 천국’이어서 질문을 끊임없이 하곤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연구를 기획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너무 좋고 행복합니다. 암환자들의 치료성적이 해가 갈수록 개선되는 것을 지켜보는 게 큰 보람이자 행운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