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의 강점 무력화한 거북선과 학익진
●장정호의 충무공 톺아보기(5)
이순신 해전의 특징 ③ 판옥선과 거북선
전쟁사에서 여러 명장들이 상대를 이기는 가장 중요한 전술이 속도다.
명장들의 공통점을 몇 개 들라치면, ‘속도를 중시한다. 병참을 중시한다. 자신이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싸운다. 포위하여 섬멸한다.’ 등을 들 수 있다.
고대의 전투에서 기마병을 극적으로 활용한 알렉산더는 최초의 전쟁영웅으로 꼽히고, 이후 기마병의 전술적 중요도는 한층 올라가는 데 그것이 바로 속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속도가 빠르면 포위전술이 가능하다.
카이사르도 기마병을 중시할 뿐 아니라 자신의 군단의 행군 속도마저도 중시하였다. 갈리아 군보다 먼저, 갈리아 군이 예측하는 속도를 넘어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 전투를 벌였다.
현대에서 이제 그 역할은 전투기로 넘어갔다. 해군 함대도, 항공모함도 모두 전투기의 정류장이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동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중 모함도 나온다. 물론 대포는 이러한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왜의 침입에 대비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 거북선의 건조도 같이 하였다.
이순신은 일본군과 직접 해전을 한 적은 없지만 그전의 왜구들의 전투 방식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을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도록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였고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왜구(일본 정규군이 아닌 일본 해적)들은 기본적으로 조선배가 나타나면 빠르게 접근을 한 후 예의 ‘등선 육박’전술로 우리 배를 제압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선채 높이를 왜구들의 배보다 높게 만들어 배에 올라타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개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판옥선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해군은 왜구세력을 상당 부분 흡수, 이를 정규군에 편성하여 조선 침략에 동원했다. 일본의 해전 전략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1) 빠르게 다가간다.
(2) 배에 올라서 배를 제압한다.
빠르게 다가가서 배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아니 올라가기 전에 근접전만 되어도 조총은 위력을 발휘하고, 올라가기까지 한다면 100년간의 내전으로 전투기계가 되었다 할 정도인 일본 군사들의 백병전을 당할 수가 없다.
(1) 속도에 대한 대처
우선, 이순신은 왜선들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여 대처하는 것, 그것은 거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고 그래서 무수히 탐망선 혹은 척후선을 동원하였다. 다음으로, 한 노에 붙는 격군들의 수를 늘려 배의 속도를 올렸다. 노예 네 명이 붙는 것과 다섯 명이 붙는 것은 분명 동력의 차이를 부른다.
마지막으로 평저선인 판옥선과 거북선의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학익진(鶴翼陣)이다. 직진에서는 빠르지만 회전 시에는 큰 원을 그리며 돌아야 하는 첨저선과는 달리 평저선은 거의 제자리에서 회전, 다시 말하면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그러한 전략인 학익진은 한산도에서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학인진의 포위 전략은 평저선인 판옥선의 회전 효율성을 극대화한 전략이었다.
(2) 근접전 혹은 올라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상황에 대한 대처
첫째, 판옥선의 높이를 조금 더 높인다.
둘째, 대포의 설치로 근접전을 불가능하도록 한다.
셋째, 아예 배에 지붕을 만들어 덮어 버린다.
바로 셋째의 배가 거북선에 해당한다. 거북선 복원에 관한 논란이 많다. 하지만 거북선 복원의 첫걸음은 판옥선 복원에서 시작돼야한다. 왜냐하면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판옥선에 ‘등선(배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지붕을 만들어 덮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그 지붕에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붕에 쇠못이나 창칼 등을 설치하고 지붕에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거적을 씌우고 물을 뿌려 적셔두었다.
등선 육박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개량된 거북선은 근접한 상태에서 발포를 하여 대포의 위력이 그만큼 배가 되었다. 바로 앞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과 특히 장군전 등의 거대 포가 날아와 배가 깨지는 모습과 소리는 왜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거북선은 근접전을 위한 방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돌격선으로 다시 태어났다.
근접전에서 조선 소나무로 만들어진 함선과 일본의 삼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충돌할 경우, 일본 배는 가볍고 빠른 반면 충격에 약한 단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조선 원정을 위해 일본은 육상전이나 명과의 전투를 신중하게 생각하였지 해전에서 이렇게 고전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수송에 주력을 둔 일본 해군이 해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군수물자의 수송이 힘들어지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도 더불어 해야만 했는데, 그들은 이순신이란 존재에 대해 임진왜란이 나기 전까지 알 수가 없었다. 일본은 겨우 마련된 대마도와 부산 간의 항로를 통해 군수 물자를 수송했는데 조선의 함대가 자원부족으로 이 항로까지는 막지 못한 것 같다. 일본은 부산을 통해 수송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부산에서 충청도로, 경기도로, 강원도로, 육송 운송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육상 운송에서의 부담이 적은, 부산에서의 비교적 단거리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해군의 접근을 지상에서 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상도 해안을 따라 울산에서 부산에 이르는 왜성을 쌓아 방어전을 펼치는 전략을 주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송의 과정에 투입되는 물적 투자에 비해, 조선의 의병들은 게릴라 전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고통을 안겨주며 결국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의 가장 심각한 패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