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감정 실린 종소리...나에겐 한때 ‘공포’

다양한 감정 실린 종소리...나에겐 한때 ‘공포’이재태의 종 이야기(13)

추억 속 의과대학의 탁상종

근대 서양의 생활이 묘사된 영화를 보면, 귀족의 서재, 은행 창구, 그리고 격조 높은 레스토랑의 식탁에는 탁상종(call bell, desk bell, table bell, hotel bell)이 놓여 있다. 탁상종은 호텔, 학교, 가게, 식당, 은행 뿐 아니라 하인이나 집사를 두고 살던 큰 저택에서, 누구를 호출하거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울려진다. 탁상종을 누르는 것은 ‘내가 여기에 왔으니 관심을 보여주세요.’ 또는 ‘나는 당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종소리에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이 실려 있다. 늦은 시간에 서재에서 울려나오는 지극하고 청아한 소리는 시상을 고뇌하던 시인이 잉크를 더 보충해달라고 요청하는 소리일 수가 있고, 가게에서 손바닥으로 세게 눌러 요란하고 오래 지속하는 소리를 만들어 낸 손님은 거기에 짜증스럽고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담았을 것이다.

 

 

탁상종은 황동이나, 동, 철, 주석 등의 합금으로 종체(body) 부분을 만들고, 위쪽의 손잡이를 누르거나 옆에 붙은 추를 당겨 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대부분 윗부분의 꼭지를 눌러서 종소리를 내는 형태(tap, 또는 push type)이나, 옆쪽에 위치한 손잡이를 당겨서 종을 치는 형(flicker type), 위의 꼭지를 손으로 돌리면 따르릉 소리가 나는 형(twist type)의 탁상종도 많다. 19세기 이후에는 시계를 만들던 장인(匠人)들에 의해 종이 만들어지면서 시계의 톱니바퀴들이 마주 돌며 기계적인 종소리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전거종과 같이 레버를 손으로 돌리는 방식, 좌우의 손잡이를 돌리면 종의 내부에서 추가 몸체를 치는 방식, 자명종 시계처럼 꼭지를 누르면 감아둔 태엽이 풀리면서 기계음을 내는 방식의 다양하고 실용적인 기계식 탁상종(mechanical bell)을 소개했다. 또한 유럽의 공예 장인들은 탁상종에 아름다운 인형 형상을 붙이고 금, 은도금을 하거나, 대리석이나 나무 받침대에 다양한 꽃으로 장식한 형태, 금속이나 당시 세상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플라스틱으로 만든 동물 모양의 기계적 탁상종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며, 우리 생활용품에도 탁상종이 장착되었고, 특히 잉크스탠드, 부인들의 화장 용기나 온도계, 식탁의 양념통과 스푼걸이에 더해진 탁상종, 각종 은제품 식기나 화병과 같은 생활 소품에 장치된 다목적 탁상종도 인기가 높은 생활 예술품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탁상종을 제작하는 방법과, 종소리가 맑고 오래 지속되도록 하는 기술은 각각 그 시기에 미국과 유럽에 특허로 등록이 되어 있기도 하다.

 

 

나는 유신 시대인 1976년 입학했으니 우리나라 현대사의 격동기 6년 동안에 의과대학을 다녔다. 재일교포와 화교 친구 6명을 더해 126명이 의예과에 같이 입학했는데, 캠퍼스의 낭만에 취하고, 세월과 불화하여 성적 관리를 못했던 친구들은 의예과에서 유급되었으나, 1978년 3월 의과대학 본과 1학년에 진입해서는 150명 이상이 좁은 교실에서 빡빡하게 수업을 받아야했다. 의과대학은 학년학점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1학점이라도 F 학점을 받거나 전체 평균이 C 학점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 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었으므로 많은 학생들이 1학년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해의 우리 동기들은 1학년에서 다시 54명이 탈락되었고, 다음 해 2학년에 진급했을 때에는 10여명의 선배들이 우리와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이 한산해 보일 정도였다. 이후에도 박대통령의 서거와 5.18 민주화 운동 등으로 계엄이 선포되고 휴교가 반복되어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112명이 졸업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같이 졸업한 동기생 가운데 입학동기생은 70명 정도이고, 입학기수로 9년 선배부터 다양한 연령이 분포하고 있다. 지금은 일본에서 유명한 의사가 된 4명의 재일교포 동기들은 미숙한 국어 실력으로 의대 6년 과정을 8-10년 정도는 다녔기에 나보다 상당히 연상이다.

 

 

의과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순간적인 집중력과 순발력도 중요하다. 자주 치러야 하는 임시 시험에서는 엄청난 분량을 암기해야 하고, 특히 2-3주간 진행되는 중간고사나 기말 시험 기간에는 세상살이 모든 것에 관심을 끄고 밤 새워가며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험 기간 중 몸이 아프거나 실연의 아픔을 겪은 청춘들은 바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천재라고 불렸던 창의적인 친구들도 답답한 암기위주의 시험과, 느긋하게 추리하고 탐구하는 과학과는 관계가 없는 이 무식한 의대 공부에 적응을 못하여 천재에서 의대의 낙제생으로 떨어지는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낙제의 공포가 가장 극심했던 의과대학 1-2학년에게 가장 힘들었던 과목은 해부학, 조직학, 병리학인데 여기에는 소위 ‘땡’시험이 있었다. 실습실에 놓인 여러 대의 현미경에 인체의 미세구조나 대표적인 질병의 병리 소견을 보여주는 유리 슬라이드가 올려져있어 현미경을 보고 진단과 적절한 소견을 쓰는 시험이었다. 또한 해부학 실습실의 사체에, 실로 묶인 바늘 끝이 가리키는 작은 구조물이나 근육, 혈관의 명칭과 기능을 기록해야 했다. 이런 시험에서는 한 문제마다 30초-1분이 배당되고, 황동 탁상종의 ‘땡’ 소리가 나면 다음 자리로 옮겨 다른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신없이 시험을 치루고 나면 모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시험장을 나올 때 쯤, 못 맞춘 정답을 생각하고 땅을 치던 시험이었다. 일부 소심한 친구들은 현미경의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당황해 하다가 답을 쓰지도 못한 채로 ‘땡’소리에 떠밀려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땡’시험은 모든 의대 학생들을 좌절하게 하는 공포의 시험이었고, 교수 눈앞에 서서 답을 읊어야 했던 구술시험과 더불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 어느 날, 나는 병리학교실 복도에서 받침대가 부러져 두 부분으로 분리된 채로 쓰레기 통 옆에 던져진 황동 탁상종을 발견하였다. 수많은 학우들에게 재시와 낙제의 고통을 주었던 녀석이 거기에서 허리가 부러진 채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 수업을 가던 중이었지만 낯 익은 탁상종을 소중하게 챙겨와 용접을 했더니, 수십 년 전 우리를 그토록 안절부절 하게 만들었던 강한 톤의 금속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내 기억의 창고에 보관된 이 종소리는 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칠 때 전해지는 두개골의 울림 정도로 아프게 기억되었는데, 이날 오랜만에 다시 들어본 탁상종 소리는 맑고 청아하였다. 종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있으니, 어려웠던 학창 시절의 옛 추억이 떠올랐고 그 시절 나를 한없이 재촉하기만 하던 탁상종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의 정겨운 친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이후 나의 연구실을 방문하는 대학 친구들에게 이 종소리를 들려주면 모두 슬그머니 자기만의 옛 기억을 하나 둘 회고하는 것이 아닌가?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보람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기에게 유리하고 즐거운 기억만 선택적으로 남는 경향이 있다는데, 우리 뇌의 해마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이 황동종을 보면서 새삼 추억은 모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는 것을 다시 깨닫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1) 세상을 깨우고 귀신 쫓고...신묘한 종들의 사연

(2) 무시무시한 검은 전사가 당장 튀어 나올 듯

(3) 적군기 녹여 종으로...승전의 환희-눈물 생생

(4) 천재 화가 ‘달리의 나라’에서 부활한 앨리스

(5)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

(6) 성모 마리아와 고문기구, 이 지독한 부조리

(7) 여왕의 꼿꼿한 자태에 서린 독립 열망과 분노

(8) 부리부리한 눈빛... 아직도 통독 황제의 위엄이

(9) “프랑스가 발 아래” 프로이센 한때의 자부심 충만

(10) 지옥같은 참호전투...전쟁 부산물 예술로 부활

(11) 전에 없던 부르조아풍 의상, 근대화 상징물로

(12) “그대에게 행운이...” 미첼레 성인의 사랑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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