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상 의사다” 명성 뒷전 늘 환자 곁에
진료실에선 외과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장은 서울에서 온 인턴을 반갑게 맞더니 갑자기 “처치실의 위암 환자가 소변이 안나오니 컷다운 하고…”지시하고 귀가해버렸다.
국립암센터 자궁암센터 박상윤 센터장은 인턴 첫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1979년 2월 28일 오후 5시 청주의 충북도립병원 외과 진료실이었다. 머리는 깜깜해졌고 몸은 얼어붙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컷다운이 뭐였더라?’ 얼른 책장에 꽂힌 교과서를 뺐다. ‘팔의 정맥을 절개한 뒤 도관을 넣어 폐부종을 방지하며 수액을 주는 것이지, 이렇게, 이렇게… 그런데 혼자 잘 할 수 있을까?’
60대인 환자는 팔이 마취된 채 눈을 껌뻑거리며, 간호사는 메스와 수술가위 등을 준비한 채 ‘젊은 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턴의 머리에서 불현듯 ‘왜?’가 떠올랐다. 말기 환자인데…. 인턴은 40대인 아들을 불러 “아버지가 임종을 피할 수 없어 댁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아들은 의외로 반색했다. 당시 객지보다 집에서 임종을 지키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인턴이 환자와 가족을 현관까지 배웅하자, 아들이 “불안해하는 아버지에게 한 마디만…”하고 부탁했다. 인턴의 머리가 또다시 깜깜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는 조심스럽게 “병원에서 주는 약은 모두 준비했다.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지 병원으로 오시면 된다”고 입을 뗐다. 인턴은 환자의 얼굴에서 안심하는 표정을 읽으며 비로소 자신이 의대생에서 의사로 변모했음을 실감했다.
박 박사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의사의 말은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신의 말처럼 중요하다. 의사는 사회로부터 환자와 보호자에게 골라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자궁암과 난소암 분야에서 최고 의술로 정평이 나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다. 의사는 환자와 전방위로 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박 박사는 중, 고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다른 식구들과 부산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4년 동안 혼자서 하숙을 하면서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공부보다는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하며 삶의 문제에 파고들었다. 성적과 출세는 속물들의 자산처럼 여겼다. 그는 한때 ‘멋진 마도로스’가 꿈이었지만 누군가를 도우면서 보람을 찾는 직업을 찾다가 의대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암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의대 3학년이었던 70년대 중반 실습을 돌던 내과에서는 암 환자와 보호자에게 “암이군요”하고 얼마 더 살 수 있을지 알려주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정형외과의 골육종의 경우 영화 ‘선샤인’에서 의사가 말한 대로 다리를 자르면 6개월, 안 자르면 3개월밖에 못사는 정도였다. 이때 산부인과에서 임부의 태반조직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어 혈액을 돌아다니는 ‘융모상피암’을 항암제로 극적으로 치유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길을 정했다.
박 박사는 충북도립병원에서 돌아와 서울대병원에서 내과, 외과, 소아과, 비뇨기과 등 산부인과와 관계있는 과들을 집중적으로 돌았다. 성형외과와 흉부외과는 자신의 희망과 관계없이 돌게 됐는데 성형외과에서 조직 이식, 흉부외과에서 혈관에 대해 이해를 높은 것이 지금 부인종양 수술에 큰 도움이 됐다고 믿고 있다.
박 박사는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강원도 사북 동원보건원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면서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복강경 수술, 신생아 인큐베이터 치료 등을 마음껏 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와 ‘심장동맥 질환의 세계적 의사’가 된 박승정, 마취통증의과 전문의 민윤기 등 ‘공중보건의 삼총사’는 몇 달 만에 적자투성이의 병원을 정선군의 인기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1986년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대학 동기인 임진호 현 마리아병원장의 제안으로 차병원에 취직했다. 차병원 차경섭 원장은 박 박사가 복강경 시술의 실력을 발휘하자 독일 킬 대학교의 셈 교수가 지은 ‘복강경 수술’이란 책을 건네주며 일독을 권했다. 박 박사가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가 각 문파의 비기(秘技)를 익히는 삶을 펼치는 실마리였다.
박 박사는 1987년 당시 ‘암 치료 의사의 로망’이었던 원자력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셈 교수가 싱가포르의 워크숍에서 특강한다는 소식에 휴가를 내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다행히 워크숍에 함께 참석한 박종민 현 길병원 교수가 셈 교수의 제자였다. 박 박사는 박종민 교수의 제안에 따라 셈 교수와 저녁을 먹으면서 복강경 수술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박 박사는 1991년 미국 예일대의 피터 슈왈츠 교수의 문중에 들어가 난소암의 세계에 대해 배웠다. 이듬해 3월 샌안토니오에서 열린 미국부인종양학회에서 자궁내막암을 복강경으로 수술하는 턱슨 대학교 조엘 칠더 교수, 수술방사선동시요법(CORT)의 대가인 독일 마인츠 대학교 마이클 헤켈 교수의 세계를 접하자 또 문하를 자청했다. 헤켈 교수와는 사제의 교류가 계속 진행돼 박 박사가 5번 독일을 방문했고, 헤켈은 3번 방한하며 정보를 교류하는 사이가 됐다.
1995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 학술대회에서 워싱턴암센터의 슈거베이커 박사를 만났다. 그는 암이 복강에 번졌을 때 복막을 떼어내며 치료하는 ‘복막절제술’의 최고수였다. 박 박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2년 뒤 슈거베이커의 교실을 찾아가 내공을 전수받고 귀국 후 이 비기를 난소암에 적극 적용했다.
이렇게 세계 최고수들의 각종 비기를 고스란히 체득한 박 박사는 2000년 국립암센터가 문을 열면서 자궁암센터장으로 영입됐다.
최근 발행된 OECD 건강관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자궁경부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이 76.9%로 회원국 평균 66%보다 월등히 높은 1위였는데, 박 박사는 ‘1위 중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난소암의 경우에도 국제적으로 3,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이 3기 40%, 4기 15% 이상이면 수준급으로 평가받는데, 박 교수는 둘 다 60%에 가깝다.
박 박사의 환자는 80% 이상이 다른 종합병원에서 의뢰한 환자들이다. 10~12시간 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의사 등과 복막과 장기를 절제하며 수술하는 경우도 많다. 국제학계에서 한때 ‘성적이 너무 뛰어나 진위가 의심스럽다’며 논문 게재를 거절 받았지만, 2004년 미국 메모리얼 슬론 캐터링 암센터의 데니스 지 박사가 국립암센터에 다녀간 뒤 미국 학계에 입소문이 나면서 국제학술지의 ‘환영 저자’가 됐다.
박 박사는 박 박사는 산부인과 명의지만, 환자 중에 남성도 드물지 않다. 박 박사가 복막절제술에서 원체 뛰어난 성적을 보이자 외과 의사들이 대장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점액을 분비하는 점액세포가 복강에 퍼진 ‘가점액성 종양’ 환자들을 보내기도 한다. 가점액성 종양은 매우 드믄 병으로 남성에게서도 생긴다. 이 병은 ‘스승’인 슈거베이커 박사가 복막절제술을 처음 적용한 분야이기도 하다.
박 박사가 이끄는 국립암센터 자궁암센터는 암이 번지거나 재발하지 않은 환자는 복강경수술로 치료부위를 최소화하고 진행성 난소암, 재발성 부인암 등 광범위한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복막, 장기 등의 암을 확실히 제거하는 것을 치료원칙으로 삼고 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나서 미국, 일본, 타이완 등에서 의사들이 ‘고수 박상윤’을 찾아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온다. 그러나 박 박사는 “특히 어려운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며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며 직위나 상, 명성에서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박상윤은 야전 임상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