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도 환자 보면 한때 골치... 두통환자 폭증
한때 두통은 환자뿐 아니라 의사도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였다. 환자들 대부분이 예민한 상태여서 조심스럽게 진료를 해야 하는데다가 치유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진료비는 형편없이 낮아 병원에서는 손해를 감수하고 환자를 봐야했다. 1990년대만 해도 의사들이 전공으로 삼기 꺼려한 분야였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정진상 교수(58)는 1995년 ‘환자 중심병원’을 슬로건으로 갓 출범한 병원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두통클리닉을 열 것을 제안했고 기분 좋게 채택됐다. 정 교수는 환자로 취급받지도 못했던 수많은 두통 환자를 위해 클리닉을 열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치료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환자를 보면서 두통에 대해 하나하나씩 배워야만 했다.
한국에는 한 수 가르침을 청할 스승도 없었다. 정 교수는 낮에는 전국에서 밀려오는 환자를 보고, 밤에는 해외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잠을 설쳤다. 두통과 관련한 학회나 심포지엄이 있으면 한달음에 뛰어갔다. 2002년엔 두통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인 미국 토머스제퍼슨의대 스티븐 실버스타인 교수에게 찾아가 1주일간 ‘개인 교습’을 받기도 했다. 정 교수는 후배 의사들을 삼성서울병원으로 불러 머리를 맞대고 두통에 대해 공부하면서 두통이 치유가능한 병으로 자리 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정 교수는 대한두통연구회와 대한두통학회 출범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2003년부터 4년간 두통학회의 회장을 맡았다. 2004년 우리나라 두통환자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05년에는 한국인 두통 특성에 대해 역학조사를 펼쳐 대한민국 성인의 12%에게서 편두통이 있고 남자 8%, 여자 16%로 여자에게서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2004년 일본두통학회에서 초청강연을 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두통 전문가들과 교류했다. 2006년 일본의 후미코 사카이 전 국제두통학회 회장과 의기투합해서 한일두통학회를 만들었다. 이 학회는 현재 아시아두통학회로 발전했다. 정 교수는 지난해에도 아와테 현 모리오카 현민정보교류센터에서 개최된 일본두통학회에서 ‘두통과 뇌졸중의 관계’와 ‘한국의 최신 두통의학 현황’에 대해 특강했다.
정 교수는 아버지가 서울대 의대 선배이지만 어릴 적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대신 두 스승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다. 한 명은 서울대병원 신경과의 ‘보스’인 고 명호진 교수. 정 교수가 뇌의 세계에 빠져들도록 ABC를 가르쳤다.
‘또 다른 아버지’인 하버드대 의대의 루이스 캐플란 교수(77)는 독특하게 인연의 끈이 연결됐다. 1991년 정 교수가 충남대 교수 재직 시절 미국신경과학회에서 뇌교(腦橋) 출혈의 유형에 대해 발표할 때 직접 찾아왔다. 그는 “논문을 읽어봤는데 아주 좋다”며 칭찬했고, 정 교수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연구결과를 ‘신경학(Neurology)’에 게재하도록 도왔다. 이듬해에는 자신이 근무하던 터프스 대학교 연구 전임의로 초청했다. 정 교수는 캐플란 교수 밑에서 시상(視床) 출혈에 대해 사례를 분류해서 미국신경학회에서 발표, 참석 학자들로부터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 연구결과는 ‘브레인(Brain)’지에 게재됐다.
정 교수는 국제 학회에 갈 때마다 ‘아버지 같은 스승’에게 인사부터 한다. 캐플란 교수에게 11월 제주에서 열리는 대한뇌졸중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초청 강연을 부탁했고 스승은 기꺼이 응했다.
정 교수는 대한뇌졸중학회의 이사장을 맡아 학회를 꾸려가면서 삼성서울병원 뇌신경센터장, 심장뇌혈관병원 운영지원실장 등을 맡아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한 해 3,000여명의 두통 환자와 2,000여명의 뇌졸중 환자를 보고 있다. 뇌졸중은 분초를 다투며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 위주로 본다. 두통 환자는 예약이 밀려서 한 번 초진을 받으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정 교수에 따르면 두통의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 두통 환자는 스트레스 탓이 많으며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치료의 주요한 열쇠가 된다. 정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진통제를 남용하는 습관이 만성두통의 주요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진통제 때문에 두통이 생긴 환자는 금연 시 금단증세를 겪듯, 약을 끊고 나서 생기는 ‘반동 통증’만 이겨내면 지긋지긋한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2004년 국내의 각종 두통 환자가 100만 명이라면 지금은 1,000만 명입니다. 많은 환자들이 두통을 감내하면서 살고 있는데 두통도 치유가 가능합니다. 의사들이 두통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고 좋은 약이 계속 나오고 있지요. 의사를 믿고 치료받으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