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주먹밥
●한주연의 꽃피는 밥상(2)
2011년 봄, 충남 온양으로 향하는 새마을호 객차. 옆자리의 중년 분이 ‘흠!’ 헛기침을 했다. 슬금슬금 흘러나오는 내 입가의 웃음이 자신을 향한 유혹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졸지에‘실없는 여자’ 가 됐지만 눈가와 입가에서 새나오는 웃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충무공을 떠올리며 번지는 미소를.
한 달 전 온양온천시장사업단으로부터‘이순신 장군이 개발한 주먹밥을 재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후부터 신기하게도 기분이 상쾌했다. 충무공이 요리연구가라니, 나의 직업선배라니….
충무공의 얼이 맴도는 현충사에서 4㎞ 떨어진 온양온천에 도착하자, 사업단 관계자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충무공이 해전승리 후 장터에 나온 백성들에게 나눠준 주먹밥의 레시피 입니다. 장군이 태어난 1545년을 기념하려고 하니, 시민 1,545명이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주세요.”
사업단은 1,545명이라는 분량에 방점을 뒀지만, 내겐 맛이 문제였다. 레시피의 주먹밥은 봄철 산과 들에서 쉽게 캘 수 있는 쌉싸래한 나물들을 조물조물 무쳐 뭉친 것인데, 왜 이렇게 쓰고 짜게 만들었을까? 자칫하다가 1,545명 모두로부터 욕을 먹는 것은 아닐까? 요리세계에서 파문 당하는 것은 아닐까?
밤새 고민하다가 충무공의 깊은 뜻을 비로소 알게 되고 무릎을 쳤다. 재료가 되는 봄나물들은 아무리 전란이라도 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특히 민들레는 메마른 돌밭, 거친 자갈밭에서도 자라는 생존력 강한 풀 아닌가? 게다가 다들 약용으로 쓸 수도 있는 나물이었다. 민들레는 염증치료에 좋고, 씀바귀는 항산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풍은 두통과 감기에도 좋고 중풍과 관절염을 예방하는 약재로 쓰인다. 매실청은 피로회복에 탁월하다. 그냥 주먹밥이 아니라 ‘식약동원(食藥同源)’의 원리에 따른, ‘전쟁통의 비타민’이었던 것이다. 음식이 짠 이유는 지금과 달리 당시 나트륨이 부족했던 때여서 이를 헤아린 것이리라.
나는 현대인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해 소금기는 줄이고 매실청을 약간 더 넣어 상큼한 맛을 살린 ‘개량 레시피’를 만들었다. 음식은 손뿐만 아니라 머리로도 만들기에 미루어 짐작은 했지만, 한 입 넣어 혀로 더듬는 순간 코끝이 찡했다. 민들레, 씀바귀, 방풍의 쌉싸래함이 새콤달콤한 매실청 향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냈던 것이다. 쓴맛, 신맛, 단맛, 짠맛이 조화를 이룬 ‘꿈의 맛’이랄까? 아, 장군의 맛!
많은 사람들이 충무공의 진중한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 이름을 들으면 나는 사랑과 섬세한 배려가 떠오른다. 장졸과 백성의 건강, 그리고 맛을 생각하며 음식을 준비했던 그 부드러운 손길 또한. 지금도 그날 ‘장군의 주먹밥’이 생각나고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만드는 법
재료(4인분) - 주먹밥 28개 정도 분량
• 쌀 300g(2컵 분량-400ml) 물 440ml, 민들레 30g, 씀바귀 30g, 방풍나물 30g(왼쪽부터), 소금 1t
• 양념장: 매실청 3T, 참기름 3T, 통깨 3T, 소금 1½t
만들기
①쌀은 깨끗이 씻어 체에 받쳐 10분 정도 두었다가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는다. 주먹밥에 어울리는 고슬밥을 지으려면 물을 쌀의 1.1배 정도로 평소보다 약간 덜 붓는다.
②양념장은 준비한 재료를 골고루 섞어 만든다.
③냄비에 물을 5컵 정도 붓는다. 물이 끓으면 소금 1t을 넣고 나물들을 각각 살짝 데쳐 찬물에 헹군다.
④민들레와 씀바귀는 찬물에 30분 정도 담가 쓴맛을 우려낸 뒤 물기를 꼭 짠다. 방풍나물은 쓴맛이 없으므로 그냥 물기를 꼭 짠다.
⑤나물들을 잘게 썰어 양념장을 몽땅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⑥밥과 양념해 둔 나물을 고루 비벼 섞은 뒤, 지름 2cm 정도의 먹기 좋은 크기로 동그랗게 뭉쳐서 담아낸다.
어울리는 술
• 입안 가득 방울이 터지는 느낌의 차가운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
• 산도 있는 과실(유자, 오미자, 산수유 등)이 첨가된 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