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원자력기구-뭐하는 곳인가
성진실의 방사선 이야기 33
지난 6개월간 연구년(교수들에게 연구에 전념하라고 허용하는 기간) 을 받아,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소재하고 있는 이 기관은 국제연합(UN) 산하 기관인데, 북한을 비롯하여 핵문제가 이슈가 될 때마다 빠짐없이 미디어에 등장하다 보니 이 기구는 핵보유 국가들에 대하여 핵사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만 인식이 고착되어 버렸다. 이 기관에 대하여 소개하고, 방사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가고자 한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실제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매우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부조직은 행정부서를 제외하고 5개의 부서가 있는데, 핵사찰업무를 전담하는 부서이외에 기술 협력부, 원자력부, 원자력 안전부, 원자력 연구 및 응용부 등, 대부분이 원자력 기술을 이용하여 인류의 복지를 추구하는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 연구 및 응용부 산하에 있는 보건국은 암과 관련된 연구를 추진하는 한편 국제 협력을 통하여 선진국의 원자력 기술이 후진국에 무상으로 보급되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원자력-방사선은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분야이다. 한편 개발도상국의 암 진단, 치료 분야는 매우 기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를테면 제대로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스템은 장비나 기술이 절대적으로 초보 수준인데, 최고 수준의 정밀 치료를 구현하는 고가 장비가, 그것도 수요도 별로 없어서 이용 빈도도 낮은 채로 방만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식이다. 이는 국가적으로 전문가가 부족하고 체계적인 정책이 부재한 가운데 일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그릇된 판단을 한 결과로 본다.
현재 개발도상국의 암발병 실태는 우려스러울 정도이다. 선진국에 비하여 2배 이상으로 가파르게 발병 빈도가 상승하고 있다. 왜 그럴까? 2년 전 국제 원자력 기구의 개발도상국 현지 조사 사업에 참여하여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였다. 국가적인 암 캠페인조차 없고 청년-노년 가릴 것 없이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청소년이 동경하는 멋진 배우들이 담배를 피우는 매혹적인(?) 자태는 도로변 대형 광고판을 통해 너무나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외국계 담배 회사의 집요한 로비 때문인지 담배 곽에 제대로 된 경고문 하나 없었다. 개인의 위생상태도 좋지 않았고, 마닐라 같은 대도시는 급속한 산업화의 동반자인 대기 오염이 최악 수준이었다.
필리핀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데 원래의 종교적인 교리가 와전이 되어서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은 죄악시 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 보니 자가 촉진(스스로 자기 몸을 만져 질병이 있는지 알아 보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여성들의 경우 유방암이 한참 진행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게 된다. 개발도상국에서 접하는 암환자는 대부분이 완치의 단계를 훨씬 벗어난 상태이다. 완치의 단계를 벗어난 암환자에게는 효과적인 완화치료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진행된 암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대안도 체계적이지 못하고 매우 허술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개발도상국의 암퇴치 사업, Programme of Action for Cancer Therapy (PACT)이다. PACT사업은 1980년도에 시작이 된 이래로 개발도상국의 암퇴치 사업을 도와서 자국 국민들의 보건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암의 예방, 조기 진단, 치료를 위한 병기 결정과 수술, 방사선 치료, 약물치료 등 항암 치료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암 보건정책을 제대로 수립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PACT의 주요 미션이다.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여러 기관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데 WHO(국제보건기구)와 같은 국제적 기구는 물론이고 미국의 암학회 및 국립 암연구소, 프랑스의 국립 암연구소 등의 국가 기관, 그 이외에도 인도의 타타(Tata) 기념병원 같은 암병원, 수개의 방사선 치료 장비업체 등 다양한 기관들이 파트너로서 PACT의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그 동안 PACT 미션에 포함된 국가들로는 알바니아, 그루지아, 가나, 마다카스카르, 몰도바, 몬테니그로, 니카라구아, 페루, 스리랑카, 시리아, 탄자니아, 베트남, 예멘 등이 있다. 이 때 PACT 쪽만의 일방적인 미션 수행으로 그치지 않고 자국의 보건국 및 관련 부서, WHO및 기타 이해 당사자들과 협력하여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자 PACT Model Demonstration Sites (PMDS)를 지정하게 되었다. 알바니아, 니카라구아, 스리랑카, 탄자니아, 베트남, 예멘 등이 PMDS 국가인데 이들은 3~5년에 걸쳐 국가 기관들이 암정책을 수립하고 재원을 확보하며 실질적인 정책 수행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PACT의 지속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하여 PMDS국가들은 인적/물적 자원을 적절하게 운용하고 암 캠페인 등 대국민 홍보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국제 원자력기구를 통하여 다른 나라로부터 물품지원을 받게 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들 국가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암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전문지식을 PMDS에 유용하게 쓰는 것이다. 필자는 방사선 종양학 전문가 자격으로 PACT의 미션에 동참하게 되었고 2년 전 필리핀 프로젝트에 이어 이번에는 베트남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베트남의 암치료 수준은 우리나라의 70~80년대와 유사하다. 방사선으로 암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주변의 정상장기를 확실하게 보호하고 암부위만 방사선을 집중적으로 투여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양, 크기 등이 다양한 개개 암에 따라 개인별로 차폐물을 제작하여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자국내 최고라는 국립 암병원에서도 차폐물 두어 가지를 만들어서 이를 모든 환자에게 적용하고 있었다. 국제 원자력기구의 지원으로 젊은 의사들을 해외로 보내 단기 연수를 시키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첨단 치료 시설의 병원에만 간다. 결국 그들이 보고 온 것은 자국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방사선 치료 전문가를 교육시키는 프로그램도 갖추어지지 않다 보니 대부분 종사자들은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지식으로 시설과 기계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니 이제 이들을 제대로 도와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UN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입장이 바뀐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만큼 개발도상 국가의 니드가 무엇인지 더 잘 알고, 실질적인 도움을 제대로 줄 수 있는 나라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국가 기관이 정책을 만들고 민간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진행하여 온 암정복 10개년 계획은 우리 자신보다 외부에서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국가 암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주요 암종의 치료 성과가 괄목할 수준으로 향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방사선 치료 부분만 보더라도 현재 우리나라의 치료 기술은 이웃나라 일본보다 우위에 있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도 30여년 전에는 고정밀과는 거리가 먼 코발트 치료기에다, 납을 주성분으로 하는 합금을 녹여서 만든 차폐물을 만들어 쓰던 시절이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정밀 설계가 없던 시절, 일일이 손으로 환자의 체형 본을 떠서 종이에 그린 후 수작업으로 선량 설계를 했었다. 그 정도의 수준도 필자가 보고 온 베트남의 현주소보다는 훨씬 우수하였다. 그 시절 활약했던 전문 기술직이 이제 은퇴 시기를 맞는 때가 왔다. 시스템만 갖추어지면 이들 인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국민이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중한 병으로 아플 때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국민이 행복한 나라이다. 해외 의료 봉사라고 하면 계절적인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주로 감염성 질환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시스템을 만들어서 지속적 사업으로 방향을 선회할 때가 되었고,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암질환에 관심을 보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