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건 아닌 것" 환자 위해선 명예도 초개처럼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박승정 교수는 협심증 환자의 심장동맥에 금속망을 넣어 혈관을 넓히는 치료에서 세계 최고수로 꼽힌다. ‘네이처’, ‘사이언스’보다 인용지수가 높은 세계 최고의 의학 학술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NEJM)’의 국내 최초, 최다(4회) 논문 게재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1996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국제 혈관 확장술 심포지엄’은 아시아에서 열리는 심장내과 학회 가운데 최대 규모,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박 교수가 2009년 매달 3박4일 일정으로 12~15명 대상의 ‘국제 의사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자 세계 각국 의사들이 ‘한 수 가르침’을 청하며 몰려들고 있다.
2009년 박 교수는 협심증에 걸린 72세 남성 환자를 돌보다 인도에서 온 제자로부터 “이럴 때에도 혈류속도를 체크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환자의 컴퓨터단층촬영(CT) 영상에 따르면 심장동맥의 특정부위가 85% 좁아진 상태. 혈관이 50% 이상 좁아지면 협심증으로 분류되므로 혈류속도 체크를 생략하는 것이 관례였다.
박 교수는 인도 제자에게 혈류속도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속도를 체크했는데, 놀랍게도 정상으로 나왔다. 박 교수는 “내일 운동부하심전도검사, 핵의학검사, 스트레스 유발 초음파 검사를 받으면 환자에게 시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날 검사에서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박 교수는 이후 협심증 환자의 혈류 속도를 체크해봤더니 심장동맥의 50~80% 좁아진 환자의 과반이 혈류검사에서 정상으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CT 이미지는 단층의 한 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입체적인 실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사들이 간과해왔던 것이다.
박 교수는 2009년 한국심장중재학회에서 그가 발견한 사실을 알려주고 “지금까지 내가 틀렸다. 상당수 필요 없는 환자에게 시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의사들이 웅성댔다. “박 교수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열심히 했는데…,” “나도 틀렸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박 교수는 “그렇다고 해서 틀린 것을 계속 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고 반문했다.
2011년 심장 분야 최고 권위 학술지 ‘서큘레이션’에서 이 이론을 주장하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2013년 11월 ‘유럽심장학회지(EHJ)’에서 “협심증 환자 5000명을 대상으로 기존방식대로 CT 결과만으로 시술 또는 수술한 환자들과 혈류유속검사에 따라 시술 또는 수술을 안한 환자들을 비교했더니 후자의 치료결과가 훨씬 좋았다”고 발표하자 서구 학자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상식에 도전하는 연구로 굴곡을 겪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거나 논리적으로 옳다고 믿으면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갔다.
1990년대 중반에는 심장동맥 중 좌관동맥주간부가 좁아진 환자를 스텐트 시술로 넓혀 치료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기존 교과서에서는 가슴을 열고 심장을 우회하는 혈관을 만드는 수술만으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영역이었다.
의사들은 “과욕에 사로잡혀 환자를 볼모로 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 하버드 대 스테판 오스텔리 교수는 박 교수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했다. 서울아산병원 내에서도 흉부외과의 한 유명 교수가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이 수술은 생사람 잡는 것이니까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고 훼방을 놓았다. 이 교수가 하도 반대해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멀쩡한 시술을 6개월 손 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신이 도왔다. 박 교수가 미국심장학회지(JACC)에 몇 달 전 제출한 논문이 실리자 병원에서도 시술을 허가했다. 오스텔리 교수는 “박 교수가 옳았다”며 특강 요청을 했다. 박 교수는 이 수술이 기존의 외과수술 못지않게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 ‘NEJM’에 발표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스텐트 시술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세브란스병원 전임의 3년차 때인 1989년 좌심방에서 좌실실로 심장혈액이 섞이지 않고 흐르도록 만드는 승모판이 좁아져 혈액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환자에게 사타구니를 통해 풍선을 넣어서 혈관을 넓혀주는 ‘승모판 협심증 풍선확장술’에 국내 처음으로 성공했다. 1991년 서울아산병원에서 협심증 환자의 사타구니에 금속망을 넣어서 심장동맥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에 국내 처음으로 성공했다.
2010년 국내 최초로 대동맥판막협착증 환자에게 스텐트 시술을 시작해서 3년 뒤 아시아 최초로 100례에 달성하기도 했다. 대동맥판막이 퇴화하고 딱딱하게 굳은 중증 대동맥판막협착증 환자에게 사타구니 혈관으로 풍선을 넣어 판막까지 도달하게 한 다음, 좁아져 있는 판막 사이에 풍선을 넣고 부풀려 판막 역할을 하는 그물망을 혈관에 고정시키는 시술이다. 주로 고령이어서 수술이 불가능한 사람이 대상이며 성공률은 94%였다.
박 교수는 한곳에 몰두하면 다른 모든 것을 잊는 스타일이다.
연세대 의대 시절 ‘뇌’에 푹 빠져 해부학교실 박수연 교수의 방에 살다시피 했다. 당시 신경과는 내과에 속해서 내과 전공의를 지망했다가 심장내과로 진로를 바꿨다. 전임의 때 무게 때문에 허리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납옷을 입고 방사선을 쬐며 밤낮 환자를 봤다. 방사선 때문에 백혈구 수치가 뚝 떨어져 한 달 동안 ‘시술실 출입금지’ 명령을 받고는 매일 시술실 주위를 서성거렸다.
서울아산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오전6시에 병원에 도착해서 밤10시경 퇴근하지만 집에서도 긴장을 늦춘 적이 없다. 언제 환자가 왔다는 호출이 올지 모르기 때문. 하룻밤 새 5번 병원에 불려간 적도 있다. 한동안 주말에 쉰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신뿐 아니라 제자나 간호사 등도 혹독하게 몰아쳤다. 팀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휘하의 모든 의료진이 병원에서 5분 내에 살도록 강제했다. 서울아산병원 심장중재시술 팀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오른 데에는 일정 기간 ‘독재’가 필요했다. 지금은 30여 명의 제자들을 조력자로서 이끌고 있다. 매일 오전 2~5명의 시술이 끝나면 연구실의 모니터를 통해서 수술방 5곳의 제자들과 대화하면서 이끌고 있는 것.
박 교수는 지금까지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쳐오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51세 때 본 늦둥이 딸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기도 하다.
박 교수는 환자에게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의 진료라고 믿는다. 시술로 가능하다면 굳이 수술할 필요가 없고, 약물치료로만 가능하다면 굳이 시술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신념이다.
“그 신념을 실현하느라고 일시적으로 병원의 수익과 의사의 일거리가 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적의 진료를 하면 결국 전국의 환자들이 몰려올 것이니까 중장기적으로는 의사에게도, 병원에게도 이익일 겁니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이익이지요. 의사의 존재 목적은 환자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