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분노의 환자에게 삶의 빛을 주는 의사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핼쑥한 여고생이 수심 많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모녀의 얼굴에 고통의 시간들이 배어 있었다. 딸은 1년 반 동안 늘 메슥거리고 무엇이든 먹기만 해도 토하는 증세로 고생했다. 전국의 병원, 용하다는 곳을 찾아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각종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어 마지막에는 정신과 진단까지 받고 약까지 처방 받았지만 증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주성 교수(50)는 모녀의 이야기를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듣고 나서는 “혹시…”하는 생각을 갖고 밤새워 지금껏 각종 병원에서 받았던 진료 자료들을 훑었다. “역시”였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지 않은 것이었다. 증세가 가슴 위쪽에 집중돼 의사들이 하부 소화관을 그냥 넘긴 것이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염증성 장질환인 ‘크론병’이었다. 약을 처방했더니 여학생은 지긋지긋한 구역질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치료 때 의사가 환자의 처지에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는 환자와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 환자가 진료실 문을 들어올 때 얼굴, 걸음걸이부터 살펴 증세가 얼마나 깊은지 판단한다. 환자의 말을 끝까지 들으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 증세까지 찾으려고 노력한다.
대학병원 교수로서는 이례적으로 환자 보호자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줘서 수시로 연락하게 한다. 그 자신도 보호자에게 전화해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한다.
“염증성 장질환에 걸린 10대 환자는 심신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환자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치유가 가능합니다. 얼마 전에는 청소년기에 발병해서 대장암까지 생긴 20대 환자가 병원에 왔는데 끝까지 치료를 거부해서 난감했습니다. 수술 전날 눈물로 호소해서 수술대에 오르게 했지요. 그러나 이후 병원에 오지 않아 걱정입니다.”
김 교수는 환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의사와의 관계에서도 활짝 열린 교수다. 영상의학과 김세형, 외과 박규주 교수 등과는 늘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환자에 대해서 의논한다. 김 교수는 “박 교수는 수술실에서도 내 전화를 받을 정도다. 두 사람이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끔씩 기적을 일으키곤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70년대 맹호부대 군의관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김상수 전 광주서석병원장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고생하는 직업”이라며 의사 직을 말렸지만 아들은 초등4학년 때 슈바이처 전기를 읽은 뒤 한 번도 의사의 꿈을 버린 적이 없다. 대학교 예과 때 잠시 운동권 동아리에 속한 적이 있지만, 그는 의술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보다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는 내과를 택했고, 그 중에서도 보다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소화기내과를 전공으로 골랐다.
김 교수는 진료뿐 아니라 학문의 영역에서도 열려있는 의사다.
의사들은 한방이나 민간요법에 대해서 벽을 쌓는 경향이 있는데 김 교수는 대학 때부터 한의학을 공부했다. 학술동아리 ‘동의학연구회’에서 의대 선후배, 간호대생과 함께 본초학 동양철학, 역사, 주역 등을 공부했으며 현재 동의학연구회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민간요법에 열린 의사답게 대장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각국에서 소화기 치료에 쓰는 천연물질들을 훑었다. 그는 인도에서 예부터 민간요법에 쓰이던 나무 구굴에서 추출한 ‘구굴스테론’을 원료로 GG-52라는 약물을 개발했다. 김 교수는 GG-52가 염증반응을 일으키는 신호를 보내는 NF-kB의 작용을 방해해서 염증성 장질환, 알코올성 위염 등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을 동물실험으로 입증해 ‘미국생리학회지(AJP),’ ‘실험 연구지(Laboratory Investigation)’ 등의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국제특허도 땄다. 이 약은 최근 생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실험에서 최대한 약물을 투여해도 안전한 것으로 나타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기다리고 있다.
김 교수는 다른 병의 약에도 벽을 쌓지 않아 고지혈증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스타틴 제제가 대장암의 진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2008년 ‘세계암학회지’에 발표했다.
김 교수는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원에서 환자를 보면서 강남센터의 부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강남센터의 막대한 건강검진 데이터를 분석해서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요즘 화두인 ‘빅 데이터 연구’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
2011년에는 대상내시경에서 살버섯(용종)이 발견됐지만 증상이 없는 환자에 대한 지침을 ‘대장(Gut)’지에 발표했다. 최근에는 설사, 변비, 복통 등 장 증상이 없는 사람은 대장내시경에서 암이 발견될 확률이 낮고 암이 발견돼도 초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특히 내시경으로 절제 가능한 암일 가능성이 커서 생존율에서 장 증세가 없는 사람보다 의미 있게 높다는 사실을 밝혀내서 유력 학회지에 발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병원 강남센터로 발령을 받아 빅 데이터를 바탕 삼은 연구뿐 아니라 △생체착용 기기(Wearable Device)를 통한 건강관리 △유전자 검사를 통한 맞춤형 건강관리 △금연, 절주, 운동 등 생활습관 관리를 통한 예방임상시험 등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를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영역의 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를 잘 아는 한 동료 교수는 “김 교수는 진료에서나 연구에서나 대인관계에서나 벽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스승이었던 ‘간 박사’ 김정룡 교수가 고명딸을 주면서 사위로 삼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끌리는, 열린 의사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