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고통, 환자 보다도 더 아파하는 의사
1995년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 암세포 연구소. 얼마 전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자리를 옮긴 스티븐 D 리치 교수가 첫 제자인 한국인 연구원을 찾았다. 리치 교수는 제자에게 “요즘 연구경비가 너무 많이 나가는 까닭이 뭐냐”고 닦달했다. 연구원은 “쥐에서 특별한 현상을 발견해서 실험을 많이 하고 있는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대답했다. 리치 교수는 당돌한 제자의 반응에 마뜩치 않은 얼굴로 “두고 보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연구원은 2주 뒤 줄기세포와 췌장암의 관계를 알려주는 데이터를 들고 나왔다. 리치 교수는 자료를 읽으며 처음에는 갸우뚱하다가, 경탄의 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리치 교수는 이에 대한 추가연구로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존스홉킨스 대학교로 스카우트됐다. 리치 교수는 한 동안 국제학회에서 “한국에서 온 닥터 송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하곤 했다.
그 연구원이 바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송시영 교수다. 송 교수는 밴더빌터 대에서 주말도 없이 매일 3, 4시간 자면서 췌장암 세포를 연구해 암 연구에 이정표가 될 발견을 한 것이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에도 1주일에 4, 5일은 진료와 연구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지금도 주말 없이 병원에서 붙박이로 지내고 있다. 병원 동료의사, 비서, 간호사 모두 송 교수에 대해 말해달라고 묻자 한목소리로 “환자와 연구밖에 모르는 워커홀릭”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이 맡고 있는 췌장암이 5년 생존율이 8%밖에 되지 않는 고약한 암이어서 두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췌장암은 조기발견이 어려워 전체 환자의 20~30%만이 수술이 가능하고 수술 받은 환자의 5년 생존율도 다른 암에 비해 현저히 낮다. 송 교수는 20여 년 환자와 보호자 몰래 속으로 아픔을 삭여 와서 지금은 웃을 때에도 미소가 자연스럽지 않다. 자녀로부터 “아빠는 왜 늘 우울한 얼굴이냐”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송 교수는 환자에게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꺼린다. 그는 환자의 초진 때 “끝까지 싸워보자”며 맞고, 치료가 힘들어졌을 때에도 “쉬었다가 나중에 치료에 들어가자”고 에둘러 말한다. 어떤 환자가 와도 진료를 거절하며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최근에는 60대 환자가 “제주도의 종합병원 의사가 송시영 교수를 찾아가라고 했다”며 무작정 병원에 찾아와서 송 교수를 찾았다. 송 교수는 회의 중 내려와서 환자를 보고는 곧바로 입원시키고 황달을 치료한 다음 항암-방사선 동시요법을 시행했다. 송 교수는 환자가 오면 두 번, 세 번 병원을 찾지 않게 신경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송 교수는 의사 집안의 영향을 받아 ‘참의사의 꿈’을 꾸며 의대에 입학했다. 큰아버지는 경희의료원장, 서울적십자병원장, 대한병원협회장 등을 역임한 송호성 박사이고 이모부는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직한 뒤 을지병원에서 93세까지 진료실을 지킨 ‘당뇨병 대가’ 김응진 박사. 전북에서 ‘농촌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경기여고, 서울대 출신의 부인과 함께 돼지를 키우고 농사하면서 환자들을 돌본 김경식 박사도 이모부다. 송 교수는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때문에 고교 2년 때까지 문과였지만, 의사의 꿈을 접지 않고 이과로 옮겨 의대로 들어왔다.
그는 전공의 때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거듭 받았지만 전공의 3년 동안 8편의 논문을 썼다. 허리가 아파 누워서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대한소화기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 전임의가 되고나서는 ‘워커홀릭 병’이 더 도졌다. 스승에게 제안해서 의대에 내시경 컨퍼런스, 저널 컨퍼런스 등을 만들었고 수많은 임상사례 파일을 정리하느라 밤을 새웠다. 소화기내시경을 도맡아 하면서 오전 2시, 4시에도 응급실에 피를 토하거나 혈변을 배설하는 환자가 오면 득달같이 뛰어갔다. 스승이 지방의 한 병원으로 갈 것을 명령했지만 “그 병원에 가면 연구를 제대로 못하므로 안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대든 일화도 유명하다. 송 교수는 전임의 3년 차 때 소화관 출혈 환자에게 두 가지 다른 약제를 넣었을 때 효과를 비교한 임상시험 결과를 권위지 ‘엔도스코피’에 발표했고 이 때문에 이듬해 조교수가 되자마자 독일 의사들의 초청으로 독일 전역에서 특강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그러나 조교수가 된 첫해 미국 소화기학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앞선 연구에 비해서 지금껏 배운 것, 연구했던 것이 너무나 초라했던 것. 잠을 줄여서 3년 동안 매년 8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내시경 치료에도 성과를 내서 식도점막하에 길이 7㎝의 종양이 있던 24세 여성을 이틀에 걸쳐 치료해서 학계에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송 교수는 1996년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방사선종양학과, 외과 등 다른 과 교수들과 함께 췌장암을 치료하는 협진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1998년 방사선종양학과 성진실 교수 팀과 함께 수술 전에 방사선치료와 항암요법을 병행하는 치료법을 개발해서 수술 받은 환자의 5년 생존율을 20%에서 50%까지 올렸다.
그는 매달 한 차례 환자들을 위한 무료강좌를 열어 환자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으며
환자의 식사에도 신경을 쓴다. 대한소화기암학회 이사장으로서 암환자가 잘 먹으면서 병마와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학회 의사들뿐 아니라 식품영양학과 학자들과 함께 소화기암영양연구회를 결성했다. 송 교수는 “일부 환자는 고기를 피하는데 암 치료 중에는 고기를 듬뿍 먹어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송 교수는 췌장암의 조기진단법을 찾다가 의료산업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됐다.
그는 1999년 전남대 로봇연구소 박종오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김태송 박사 등과 함께 캡슐내시경을 개발해서 벤처기업 인트로메딕에 기술을 전수했다. 캡슐내시경은 입으로 삼키면 몸 안에서 소화기를 샅샅이 검사하는 초소형 진단장비. 인트로메딕 제품은 이스라엘 제품보다 뒤늦게 나왔지만 배터리 시간이 갑절이어서 그만큼 몸속에 오래 머물면서 영상을 확보할 수 있고 해상도도 기존 제품보다 높았다.
그는 “지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지만 국내 임상시험 허가가 늦어져 외국 제품에 뒤처지게 됐다”면서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나라 의료산업의 한계를 절감했지만 가능성에 대해서도 똑똑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연세의료원 의과학연구처장과 대한의용생체공학회 수석부회장(차기 회장)으로서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부, 산업통산자원부 등에서 대한민국 의료산업 육성을 위한 기획과 자문을 맡아 이에 대한 준비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의료산업화와 관련한 학회, 심포지엄과 세미나 등에서의 특강도 줄을 잇고 있다.
송 교수는 밴더빌터 대학교에서 시작한 암줄기세포 연구에서 스승인 리치 교수 못지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암줄기세포를 연구해서 췌장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인 맞춤형 항암제를 개발하기 위해 잠을 설치고 있다. 이 과정에서 20여 개의 국제특허를 땄다. 송 교수는 혈액이나 타액 세포에서 췌장암을 알려주는 특정한 바이오마커를 찾아내 암을 일찍 찾는 ‘액상 조직검사’로 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혈액 속 2, 3개 세포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해 환자별로 다르게 치료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그는 또 LG전자와 함께 유전체 DB를 바탕으로 췌장암과 담낭, 담도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맞춤형으로 치료하는 연구, 내시경을 통해 유전자 발현 여부를 관찰하는 연구 등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표적 항암제가 속속 등장해서 췌장암이 더 이상 ‘마의 암’이 아니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숱한 환자가 송 교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완치되고 있지만, 이 기적이 기적이 아니게 되는 날을 앞당기게 하기 위해 잠시도 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