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잡이가 칼을 안 써?" 비아냥 속 새 수술 비법 개발
1995년 연세대 의대 노성훈 교수(59)는 대한외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자신의 위암 수술 장면을 비디오로 발표했다. 의사들이 웅성거렸다. 한 편 놀라는 눈치, 한 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노 교수는 신경외과나 정형외과에서 주로 쓰던 전기소작기로 암 부위를 자르고 지진 다음 자동연결기로 마무리했다. 메스를 쓰지 않는 새 수술법이었다. 수술 시간은 기존 4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었다. 그러나 몇몇 의사는 한동안 “칼잡이가 칼을 쓰지 않다니 제 정신인가”하고 비아냥댔다.
노 교수는 이듬해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국제외과종양학회에서, 다음 해에는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세계위암학회에서 새 수술법에 대해서 발표했다. 외국 의사들의 반응은 좀 더 적극적이었다. 일본 도쿄 대의 세토 교수가 ‘한 수 가르침’을 요청했고 제자들을 노 교수 문하로 보내기 시작했다. 도쿄의치과대 고지마 교수, 기후대 요시다 교수, 시조오카 암센터 테라시마 박사, 가고시마 대 나츠고에 교수 등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가르치는 데 익숙했던 일본의 대가들이 앞 다퉈 제자들을 보냈고 매년 미국, 중국, 인도 등 세계 각국에서 100여 명의 의사들이 ‘노성훈 문중’에 몰려들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국내외에서 ‘전기소작기 수술법’이 시나브로 번지더니, 지금은 지구촌 표준 치료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 동안 노 교수는 한 해 600명꼴로 지금까지 9000명 가까이 수술하며 세계 최다 기록을 세웠다. 놀라운 것은 수술 성공률과 드문 부작용이었다.
“당시 원로교수들은 위암 수술은 오랜 기간 검증을 거쳐 정착됐기 때문에 20년 전, 10년 전이나 똑같고 지금도 똑같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입니까? 의사의 관점에서는 당연하게 보이던 것도 환자나 보호자의 눈으로 보면 비정상적일 수가 있습니다.”
노 교수는 환자들에게 무엇이 불편한지를 묻고 또 물어 치료법을 개선했다. 1990년대에는 위암 환자가 수술을 받으면 수술 부위의 분비액과 가스가 빠져나가도록 코로 넣어 수술 부위까지 연결되는 콧줄을 달아야 했는데, 노 교수는 수술 때 주사로 가스를 빼내어 콧줄을 달지 않도록 했다. 그는 또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겼을 때 고름을 배출하려고 환자에 배에 넣는 심지도 쓰지 않는다. 노 교수는 수술 부위를 25㎝에서 15㎝로 줄여 배꼽 아래에 수술자국이 없다. 척추에 꼽은 튜브를 통해 환자가 마취제를 자동으로 넣을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환자가 통증을 덜 느끼도록 했다.
1990년대까지는 위암 수술 때 재발을 막기 위해 비장(지라)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노 교수는 면역 기능과 관련 있는 비장을 잘라내지 않고 주위의 림프절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술법을 개발했다. 최근에는 위와 십이지장의 연결부위를 최소화해서 후유증을 줄이는 수술법을 개발했다.
위암 수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대가’로 인정받은 노 교수는 2011년부터 세계위암학회 회장을 맡아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올해만 해도 3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위암학회에서 특강을 했고 5월에는 러시아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러시아대장암학회에서 ‘위암과 대장암의 유사점과 차이’에 대해 강연했다. 6월에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위암학회에서 ‘위암 수술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7월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종양내과학회에서 1000여명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서울대병원 방영주 교수와 함께 연구한 ‘수술과 항암제 병행치료의 효과’에 대해 발표했다.
노 교수는 환자나 제자 모두에게 시원시원하게 대해서 ‘동네 아저씨’로 보이지만, 집안 내력이 화려하다. 선친은 장항제련소 소장을 지냈고 국내 금속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노병식 박사다. 처가는 유명한 의학자 집안이다. 장인은 혼자서 첫 의학백과사전을 만든 고(故) 이우주 전 연세대 총장이고 손위처남은 간질 치료의 국내 최고 대가인 연세대 신경과 이병인 교수, 손아래처남은 박근혜 대통령의 주치의인 이병석 강남세브란스병원장이다.
노 교수는 “위암은 적절하게만 치료받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병”이라고 강조한다. 5년 생존율이 10년 전의 67%에서 지금 75%로 높아졌으며 병기별로는 1기 95%, 2기 80%, 3기 60%, 4기 15%로 향상됐다. 내시경, 복강경 등을 이용해 후유증과 부작용을 줄인 새 치료법도 확산되고 있다.
노 교수는 “내시경이나 복강경 치료가 개복수술보다 부작용이 적지만 모든 환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면서 “환자는 대체로 한번밖에 기회가 없으므로 인터넷이나 주위의 ‘카더라 통신’에 현혹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수술 환자의 장기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다. 요즘엔 유전자 연구로 수술 뒤 누구에게 어떤 항암제를 써야 하는지 방법을 찾고 있다. 최근 개최한 암수술 웨비나(Webinar, 온라인 세미나)를 확대해 세계 각국의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열중이다. 세브란스 암병원장으로서 새 병원 설립에도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암 환자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라고 힘줘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제 위암은 너무 늦게 발견하지만 않는다면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40세 이상은 1, 2년에 한 번은 내시경검사를 받고 40세 이하라도 소화가 안 되고 더부룩하거나 속이 쓰린 증세가 1~2주 이상 지속되거나 되풀이되면 내시경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위암 희생, 주의를 기울이면 막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