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협회장이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박근혜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대한의사협회장 노환규입니다. 
지난해 10월7일 제1회 한마음의사가족대회에 당시 대통령 후보 신분으로 찾아와서 의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늦게나마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당시 대통령께서 “오직 올바른 의료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의료인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할 수 있다면 의사들을 적극 돕겠다”면서 “의사들이 오로지 환자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국민들도 건강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곤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후보시절부터 대통령이 되신 이후에도 줄곧 ‘안전한 대한민국’을 강조해 오셨습니다. 경제의 부흥도, 문화의 융성도, 그리고 국민의 행복도 모두 국민의 건강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건강을 지켜내는 것이 곧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첫걸음이므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의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한마음의사가족대회에서 “1977년 첫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이후, 지난 36년이 흐른 지금 건강보험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지금의 건강보험제도는 마치 깨어진 달걀에 반창고를 붙여놓고 색칠을 해놓은 달걀과 다름이 없습니다. 의료의 소비자인 국민과 공급자인 보건의료인들이 다 함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저수가 제도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의료이용률은 OECD 국가들 평균의 약 2배입니다. 외래 이용률도 약 2배이고 연간 입원기간도 2배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지출되는 총 의료비도 2배가 돼야 하는데, 지출 의료비는 OECD 평균의 약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의료행위에 대해 건강보험공단이 지불하는 진료수가가 OECD 평균의 1/3에 불과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입니다. 이 진료수가는 공급자가 정하지 않습니다. 공급자와 건강보험공단이 협의해서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정부가 진료수가를 낮게 유지해 온 이유는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원가에 못 미치는 진료수가, 문제가 없을까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진료수가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 드리면, 미국에서 약 120만원 받는 위내시경 검사료가 우리나라에서는 4만원입니다. 이 비용은 환자의 본인부담과 건강보험공단의 부담금을 합한 금액입니다.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4만원씩 받아 어지간해서는 약 1억 원에 이르는 내시경 장비의 원금과 이자를 낼 만큼 이익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의료사고라도 발생하면 수억 원을 배상해야 하므로 위내시경을 하는 병의원들은 상세한 검사보다는 가능한 많은 검사를 해야만 하는 실정입니다.  

 

적정진료를 위해서는 적정수가가 필요한데, 지나친 저수가가 소홀한 진료를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장내시경도 마찬가지이며, 검사의 시간과 진단의 정확도가 비례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보고를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저수가가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낮은 진료비 때문에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국민의 건강을 기원해야 할 의사들이 독감이라도 돌아 많은 환자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낮은 진료수가 때문에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과 고도의 전문기술로 숙련된 산부인과, 비뇨기과, 흉부외과 전문의들이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떠나 얼굴의 점을 빼거나 눈, 코 성형수술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곧바로 국민의 피해로 돌아갑니다. 예컨대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는 모성사망률은 2008년도에 비해 2011년도에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수준이 좋아지는데 사망률이 오히려 높아지는 것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지나치게 낮은 수가 때문에 진료현장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낮은 진료수가로 동네의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990년 건강보험공단의 의료기관 지출비 가운데 대형병원과 동네의원에 지출된 비율은 각각 55%와 45%였습니다. 그런데 2011년 이 비율은 78.4%와 21.6%로 바뀌었습니다. 동네의원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의사들 사이에서 저수가 시스템이 동네의원 붕괴의 주범이라는 데 이론이 없습니다. 동네의원이 무너지면 국민의 안전망이 무너지는데 지금 동네의원은 붕괴 직전의 상황입니다.

-“국민도 의료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낮은 진료수가로 국민이 많은 혜택을 받을 것 같지만 불행하게도 낮은 진료수가는 의원과 중소병원에서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대학병원이 진료수가 역시 낮게 책정되어 있지만 대학병원은 ‘선택진료비’와 비급여로 책정된 여러 진료항목을 통해 저수가를 벌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진료비와 비급여는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갑니다. 예컨대 동네의원에서 내시경 검사비용이 4만원인데 반해, 대학병원의 심장 초음파검사비용은 무려 40만원에 이르는 곳이 있습니다. 보험이 되지 않고 선택진료비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은 의료비를 자기 호주머니에서 내는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OECD 34개국과 6개 주요 국가를 포함한 40개 국가 중 우리나라는 의료비의 국민부담률이 2009년 두 번째로 높았다가 2011년 5위로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국민의 자가부담률이 높습니다. 이 때문에 의료비를 내느라 가정이 경제적 파탄에 빠지는 ‘재난적 의료비’(가구 가처분소득의 40%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하는 경우)의 발생비율이 OECD국가 중 첫 번째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정부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책임을 국민에게만 미뤄놓고 다른 나라에 비해 지원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재정파탄, 건보공단은 천문학적 이익 발생”

얼마 전 건강보험공단은 2012년 결산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려 3조 9천억 원의 흑자를 낸 것입니다.

의료비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데, 국민으로부터 건강보험료를 강제로 걷어 운영하는 건강보험공단은 무려 4조원 가까운 흑자를 낸 것입니다.  

 

직원이 1만 명을 넘는 방대한 조직에서 성과급을 포함해서 한 해 1조 원이 넘는 경비를 쓰고도 이와 같은 흑자를 봤다는 것은 결국 국민과 의사들에게 정상적으로 지급돼야 할 돈이 안 갔다는 것이 아닐까요? 국민도, 의료공급자도 모두 피해자입니다.

-“새판을 짤 때가 왔습니다.”

대통령님!

현행 건강보험제도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병원의 문턱을 낮추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의료혜택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저수가 저부담’을 원칙으로 설계된 제도입니다. 당시 나라가 가난했기에 많은 부분을 빈 칸으로 남겨두고 불완전한 형태로 도입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국민이 의료의 질에 눈을 뜬 지금, 저수가 정책은 왜곡된 의료서비스를 초래하고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오히려 커져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의사협회장이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이제 적정진료를 위한 적정수가를 책정하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적정수가의 보장성 확대를 통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대대적인 건강보험 개편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대한의사협회장으로서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4대 중증질환의 완전보장도 중요하지만, 안전한 대한민국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건강보험제도의 전면적 개편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한 숙제라는 점을! 선친께서 뿌리신 건강보험의 씨앗이 맛있는 열매로 주렁주렁 열려서 대한민국이 건강해지도록 관심을 쏟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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