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 이야기 23 <어머니와 아들 1-진행성 췌장암>

 

아들은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어머니도 아들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기댈 곳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온갖 허드렛일 해가며 어렵게 아들을 키워 온 그녀는 첫 만남에서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제는 좀처럼 만나 보기 어려운, 그러나 이전부터 우리가 듣고 익숙해져버린 고전적인 의미의 우리네 어머니들! 자식의 장래를 위한 염려와 헌신이 스스로의 삶의 전부인 것 같은 그런 모습 말이다.

이미 췌장암이란 진단을 받았다. 수술로 제거를 해야 완치를 기대해 볼 수 있는데, 어머니의 병은 이미 수술 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 있었다. 차선책이라고 하여 전문 의사가 권하는 대로 항암 화학 요법-방사선 치료의 병용 치료를 받았다. 치료 성과를 평가한 결과, 영상 검사에서 더 이상 병의 진행은 없으나 그렇다고 눈에 띠는 수준의 변화를 보이지도 않았다. 더 지켜보잔다. 수술이 완치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들은 내로라하는 췌장 수술 명의들을 찾아 나선다. 한결같은 답, “더 이상 방도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아들은 이제 다른 방면으로 의사를 찾는다. 수술은 아니어도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하는 치료는 어디서 누가 하는지. 아들은 이전에 방송에 나왔던 췌장암 치료 성과에 대한 보도를 접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의 이야기였다. 절망에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아들의 질문,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췌장암은 진단이 퍽 까다로운 병이다. 췌장이라는 장기가 위나 간에 비해 일반인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은 장기인데 암증상도 애매해서 위/십이지장의 염증이나 궤양과도 흡사하게 명치 아래가 무겁고 속 쓰리듯 아프거나 소화 불량 정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증상을 가지고 병원을 방문했을 때, 경험이 많지 않은 의사는 대뜸 위/십이지장의 질병을 의심한다. 사실 한국인 대부분에서는 위/십이지장 내시경을 하면 경증 이상의 염증이 흔히 발견되므로 의사는 “아, 위에 염증이 있네요, 이 약 드시면 먹으면 좋아지실 겁니다” 하고 웃으면서 염증이나 궤양을 치료하는 복용약을 처방해주기가 쉽다. 의학의 기본 접근 자세가 흔한 질병부터 의심하고 보는 것이 원칙이므로 이를 탓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술이 가능한 조기 단계의 췌장암이 발견 되려면 이 시기에도 췌장을 평가할 수 있는 검사를 할 필요가 있다. 복부 초음파 검사 또는 컴퓨터 단층 촬영같은 영상검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췌장이 위치하고 있는 상복부는 매우 복잡하다. 췌장 바로 앞에는 위장이, 옆과 아래로는 십이지장이 갈고리 모양으로 췌장을 에워싸고 있다. 이 부위에 중요한 혈관들이 지나가는데, 암이 진행되면 주요 혈관을 침범하게 되고 완치로 갈 수 있게 하는 근치적 절제 수술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암의 크기가 기껏 2cm내외로 작은데도 불구하고 수술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수술의 차선책으로 항암 화학 요법-방사선 치료를 하는 경우에도 췌장 주변의 복잡한 구조는 또 한 번 장애물이 된다. 암을 제대로 치료할 만큼 방사선을 투여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신체 장기 중에서 방사선에 민감한 것으로 유명한 위장과 십이지장이 종양에 밀착되어 있는 구조인 것이다. 더구나 병용 치료하게 되는 항암 화학 요법은 암치료 효과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 역시 상승시킨다! 이 부작용이라는 것이 일단 생기면 정말 괴롭다. 궤양이 광범위하게 생겨서 계속 출혈이 되는데 오랜 항암 화학 요법을 받은 암환자는 일반인과 달리 지혈도 쉽게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췌장암은 ‘난치성 암’으로 소문난, 암 전문가에게조차도 절망적인 질병이었다. 게다가 치료하고 난 후 췌장암 자체가 그럭저럭 안정세로 유지된다 싶으면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곧 간으로 암의 전이가 일어난다.

어머니의 검사 사진을 보고 의사는 한참을 고심한다. 여기 오기까지 어머니를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항암 화학 요법-방사선 치료의 복합 치료에 따르는 부작용을 염려해서인지 방사선 조사량을 다소 적게 투여하였던 것 같아 보인다. 따라서 추가적으로 치료할 만한 여지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때는 정밀 방사선 치료 기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안전한 범위 한도를 넘어서서 추가로 방사선 치료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정밀 치료라고 해도 위험 부담이 따른다. 의사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상황, 즉 위험 부담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서 환자 측으로부터 원망을 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기로 하고 동의를 구한다.

어머니와 아들은 의사가 제안한 그 작은 희망의 끈에 매달렸다. 정밀 치료의 설계과정은 처음 받았던 방사선 치료의 경우보다 시간도 더 걸렸고 여러 차례의 확인 과정이 뒤따랐기에 시작이 늦어지는 데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 항암 화학 요법과 병행하는 추가 방사선 치료과정이 3주간 시행되는 동안 내내 긴장해 시간이 어떻게 간지도 몰랐다. 이제 평가의 시간, 종양 수치와 종양 크기에 미약하나마 변화가 보인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1개월이 지나자 더욱 분명해져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혈관 침범 부위가 수술로 떼어내는데 문제가 없을 만큼 위축을 보이게 까지 되었다. 근치적 암 절제 수술이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다.

진찰실을 방문한 어머니와 아들, 아무 말도 잇지 못한다. 그냥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하다. 감동의 순간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손을 잡은 아들은 그저 눈물만 흘린다. 이 순간까지 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절망적인 암을 전문 분야로 하는 의사들에게 최고의 순간이다.

방사선 이야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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