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선 이야기 22 <운명을 가르는 순간,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

 

커리어 우먼 헬렌은 갑작스런 해고 통지를 받는다. 남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한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그녀의 앞에서 지하철 문이 닫히려 한다. 닫히는 문을 비집고 간신히 올라 탄 헬렌, 예상치 않은 시간에 귀가한 그녀 앞에 펼쳐진 것은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이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다. 멋진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홍보 회사를 창업하여 바라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지하철을 놓쳤다면? 지하철을 놓친 헬렌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택시를 기다리다가 사고를 당한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헬렌은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보지 못한다. 그녀는 글 쓴답시고 거의 백수이다시피 한 남자 친구와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온갖 허드레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간신히 괜찮은 직장을 찾았는데, 면접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미래의 상사는 바로 남자 친구의 연인이고 그녀와 남자 친구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도의 깊은 관계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헬렌은 자신을 배신한 남자 친구에게서 벗어나려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다.

방사선 이야기 22 지난 1998년 개봉한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Sliding Doors)’의 줄거리이다. 피터 호윗이 감독하고 기네스 팰트로우가 헬렌 역으로 열연했다. 닫히는 지하철 문으로 인해 두 가지로 갈라지는 인생 이야기를 담은 매우 흥미로운 설정의 영화이다.

이와 비슷한 결정적인 순간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다. 암환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50대의 중년 남자, 윗배가 무지룩하고 늘상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약국에 가서 소화제 사먹기를 근 6개월, 몸의 피로도가 더 심해지는 듯 하고, 최근에는 대변 색깔도 검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인근 내과 의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했다. 위염이나 위궤양 정도로 나올 줄 기대하고, 약국보다는 전문의 처방약 지어 먹으면 나아질 걸로 기대하고 갔는데, 검사가 예상보다 길어졌다. 권고에 따라 큰 병원으로 의뢰되었다. 조직 검사를 위한 내시경 검사를 다시 했고, 컴퓨터 단층 촬영, 각종 혈액검사……. 꽤 많은 검사 후에 그가 들은 말은 위암.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는 않았으나 인접한 연부 조직, 임파선 등으로 확산되어서 수술을 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수술로 제거하지 못하면 완치가 어렵다는 말도 들었다.

주치의로부터 자신의 병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난 재혁씨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다. 외과 의사 뿐 만 아니라, 항암 약물 치료, 방사선 치료, 영상 판독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진료 방침을 토론하는 회의에서 종합적으로 의논한 결과 항암 약물-방사선의 병용 치료를 하여 최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다시 평가하여 수술 가능성을 재타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약 5주간 항암 약물-방사선의 병용 치료를 받았다. 속도 쓰라리고 구역질에다가, 음식을 영 먹을 수 없어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고 1개월이 지나서 검사를 해보니 종양 수치가 거의 정상에 가깝게 떨어지고, 컴퓨터 단층 촬영에서도 종양의 크기가 놀라울 정도로 줄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시행한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떼어낸 암덩어리를 정밀 조사 해보니 실제 살아있는 암세포는 전체 덩어리의 10%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항암 약물치료를 몇 차례 더 받았고 드디어 진단이 된 지 만으로 5년이 지났다. 완치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나간 순간들이 영화 필름 빨리 돌리듯이 휙휙 지나갔다.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철승씨는 같은 질병을 가진 또 다른 50대 남자이다. 수술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잘 고친다는 ‘명의’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아들도 합세하여 인터넷 검색에 매달렸다. 그가 찾아간 여러 곳의 소규모 진료실에서 이름도 외기 어려운 신통하다는 치료들을 받았다. 효과 좋다는 약초도 어렵사리 구해다가 정성껏 달여 먹었다. 그의 아내는 지성으로 기도하며 각종 종교 집회에 매달렸다. 한동안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서 이제 효과를 보나 싶었다. 그러나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심한 허리 통증을 겪게 되었다. 웬만한 진통제에도 듣지 않았다. 며칠 후에는 두 다리에 기운이 쭉 빠지면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종합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 암이 더욱 진행이 되었고 특히 등허리 부분의 척추 뼈에 암이 전이가 되면서 인접해 있는 척수 신경을 압박하여 두 다리에 마비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증상이 생기자마자 신속하게 병원을 찾은 덕에 증상을 완화시킬 치료를 해볼만 하다는 것이었다. 척수 뼈에 전이된 암에 약 2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통증도 좋아지고 마비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다리에 기운이 없는 것은 느린 속도로 호전이 있었다. 전신적으로 암이 퍼져있는 상태라서 항암 약물요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워낙 암이 많이 퍼진 상태라서 그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두 환자를 기억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영화 속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두 가지 상황이 전개되지만,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결정의 순간은 많은 경우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다. 지혜로운 자에게 기회가 열린다는 옛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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