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닥터]아듀!, 한국축구 최고의 골키퍼 이운재
축구 경기장에서 “야 저쪽 팀 골키퍼는 풀 뽑고 있네”라는 소리가 나오면 한 팀이 일방적으로 우세를 보일 때다. 사실 강한 팀이 계속해서 파상공세를 펼치면 그 팀 골키퍼는 할 일이 없어진다. 많이 뛰는 공격수나 미드필더들은 한 경기에서 약 12㎞ 정도를 뛰는 데 골키퍼는 골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으니 할 일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연습할 때 보면 가장 힘든 선수가 골키퍼다. 코치가 던지거나 차주는 볼을 끊임없이 다이빙을 하며 받아내야 하고, 공격수들의 슈팅 연습 때는 대포알 같은 슈팅을 막아내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유니폼이 가장 먼저 닳아서 못쓰게 되고 몸에 상처가 가장 많은 선수가 골키퍼이기도 하다.
골키퍼는 스트레스도 가장 많이 받는다. 사소한 실수만 해도 골을 허용할 수 있어 팀 패배의 비난을 혼자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2000년 40세에 단명한 고(故) 오연교 골키퍼가 그랬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때 한국대표팀 수문장이었던 고인은 대회 이후 ‘골키퍼 때문에 망했다’는 엄청난 질책 속에 괴로워했고 결국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의 지병이 이런 비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평소 고인은 “쏟아지는 가시 돋친 비난이 정말 가슴 아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직업별 평균수명을 보면 종교인이 평균 80세로 가장 길고, 체육인은 67세밖에 되지 않는데 체육인 그중에서도 골키퍼는 수명이 더 짧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어려운 골키퍼 자리를 23년간 지키면서 한국 골키퍼로는 최초로 센추리클럽(국가대표팀 간 경기 100경기 이상 출전)에 가입한 최고의 수문장이 지난주 은퇴를 했다. 승부차기에 특히 강해 ‘거미손’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운재(39)가 바로 그다.
이운재는 지난 17일 기자회견을 갖고 “축구 선수로서 인생을 정리하고, 팬들과 헤어짐을 준비하기 위해 여기에 섰다. 선수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에 어느 때보다 축구선수라는 단어가 절실하게 느껴진다”면서 “축구만 바라보고 온 나로서는 쉽지 않지만 앞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이운재의 경력은 화려하다. 한국축구의 레전드라 할 만하다.
프로축구 K리그 통산 410경기에 출전해 최초로 골키퍼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고, 국가대표로 132경기에 나섰으며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부터 2007년 아시안컵까지 6년간 한국축구의 골문 앞에는 항상 이운재가 있었다. 아시안컵 당시 음주파동으로 대표선수 자격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은 게 한 가지 흠으로 남았지만 이후 재기에 성공해 K리그에서 이름값을 했다.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이운재가 선수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이 살과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쉽게 살이 찌는 체질 탓에 팬들로부터 ‘이운재가 운동을 안 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너무 힘들었던 것. 이운재는 “주위의 오해 때문에 웃고 울고 했다. 체중 조절을 위해 남들보다 식단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고 털어놨다. 이렇게 23년간 꿋꿋하게 골문을 잘 지킨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