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염 보유자, 발병때 술끊으면 된다고?
지금도 엄연히 환자… 건강생활-정밀검진 필수
대기업 정보기술(IT) 계열사 영업과장 김영민(가명·37)씨는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이지만 “아직 환자가 아니니까 나중에 발병하면 조심하면 된다”며 일을 핑계 삼아 술을 퍼부어왔다. 그러던 그는 최근 술자리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병원에 옮겨졌다. 혼수상태에서 이틀 동안 고함을 지르다가 ‘어머니가 있는 세상’으로 갔다. 그는 간경변증이 왔지만 ‘과로, 과음 때문에 피로한 것이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병을 키웠다. 부인과 초등 1학년 딸은 요즘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난다.
동네병원을 운영했던 이진영(가명·여·42)씨는 병원 이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병원 수지를 맞추기 위해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매년 간 검사를 받아왔던 그는 검진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해를 건너뛰었다. 이듬해 검진에서 끔찍한 진단 결과를 받았다. 간암이 온몸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3개월만을 더 살았다.
김씨처럼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가 자신은 환자가 아니라고 믿고, 간염이 발병해서 환자가 되면 술을 끊겠다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아직 환자가 아니고 그냥 보유자라는 ‘낙관론’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만성적으로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엄연한 환자다.
간염 환자 차별을 풀면서 온 오해
우리나라의 B형 간염 환자는 4.4%. B형 간염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취업에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B형 간염이 있는데도 건강관리에 소홀하면 바이러스가 언제든지 증식할 수 있다.
B형 간염은 혈액을 통해 전염된다. 공기 중이나 술잔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나라 인구의 90% 이상이 예방접종으로 간염 항체를 몸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직장생활이나 군생활 등을 통해 전염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이에 따라 2000년 전염병예방법이 개정돼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에 대한 취업 제한이 풀렸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지난해 5월 A외국어고가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에게 기숙사 입사를 불허한 것에 대해 차별이라고 판단, 해당 고교에 관련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A외국어고 교장에게 피해 학생의 기숙사 입사를 허용하고, 학교생활에서 병력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했다.
진정인 김모(남·45)씨는 “아들이 A외국어고에 합격해 기숙사에 입사하려 했으나 만성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이유로 기숙사 입사를 불허당했다”며 2010년 12월 인권위에 진정서를 냈다.
이 와중에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들에 대한 오해가 퍼졌다. 바이러스 보유자와 환자는 전혀 다르므로 보유자는 발병이 될 때까지는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보유자도 환자다
의학자들은 간염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도 엄연히 환자라고 강조한다. 옛날에는 활동성 환자와 건강 보유자로 나눴는데, 요즘에는 활동성 환자와 비활동성 환자로 구분한다.
하지만 많은 비활동성 환자들은 “열이 나고 얼굴이 노래지는 등 간염이 본격 발병하면 치료를 받으면 되지, 신경 쓰면 더 해롭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간염이 본격 발병해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인들은 감기나 독감 같은 증세가 나타나면 활동성이 시작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바이러스가 이전에 없다가 갑자기 간염이 생긴 ‘급성’ 환자다.
비활동성 간염 환자의 바이러스가 증식 상태에 들어갈 때에는 대부분 약간 피로하다는 느낌만 들고 증세가 없다. 증세 없이 간세포의 염증이 진행되는 경우가 증세가 있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고주망태는 평소 늘 그런 증세를 느끼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다. ‘피로했다 괜찮아졌다’를 되풀이하면서 간경변증이 진행돼 때를 놓칠 수 있다. 얼굴이 노랗고 열이 나서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이미 간에 손상이 왔을 가능성이 크다.
비활동성 간염 안심 못한다
대만국립대가 2006년 미국의학회지(JAMA)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활동성 간염은 10년 뒤 20% 이상이 간경변증으로 진행되고 10% 이상이 간암으로 발전한다. 비활동성도 안심하지 못한다. 10년 뒤 10% 이상이 간경변증으로, 3.6%가 간암으로 바뀐다.
B형 간염 바이러스는 변화무쌍하다. 지금은 비활동성이라고 해도 언제까지 그렇다는 보장이 없다. 나이가 많을수록,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특히 술을 즐기는 남성이나 당뇨병 환자, 비만인 사람은 간경변증과 간암 확률이 높아진다. 담배를 피우면 간암의 확률도 덩달아 상승한다. 헛개나무가 간에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없다. 골고루 먹으면서 술, 담배를 멀리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게 간 건강 관리의 기본이다.
B형 간염 환자의 배 안이 기름져서 지방간이 생기면 증세가 안 좋다. 간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므로 단백질을 충분히 보충하면 간의 부담을 덜어줘 좋다. 따라서 고기는 충분히 섭취하되 기름기를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
조기 검진이 무엇보다 중요
문제는 일반적 신체검사로는 비활동성 간염이 활동성으로 바뀌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반검사에서는 간수치(ALT)를 주로 체크하는데, 요즘에는 혈액 내 바이러스 농도를 더 중시한다. 비활동성 간염 환자는 매년 정밀검사, 활동성 간염 환자는 최소 6개월에 1회의 검진이 필수다.
간은 바이러스 때문에 한번 손상되면 회복이 힘들다. 비활동성 환자는 조기 검진을 받고 항바이러스 제제를 쓰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일찍 치료하면 약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를 놓쳐 간경변증이 진행되면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한다. (도움말=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김도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