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던트> 당신이 꿈꾸는 죽음은 무엇입니까?
임재현의 영화 속 의학이야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가족’을 남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영화 [디센던트]에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현실이지만
살아가는 사람이 더 중요한 현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손과 또
그 자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이고 그 역사가 우리 삶의 의미라는 것이지요.
영화의 제목인 디센던트는 자손, 혹은 유산이라는 뜻인데,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말하는 디센던트의 핵심은 바로 가족입니다.
영화 [디센던트]는 하와이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와이의 자연을
본 사람들의 생각은 대부분 그러할 것입니다. 심지어 의사들도 하와이의 병원에서
근무해보는 것이 꿈일 수 있습니다. 치료와 휴양을 겸하는 리조트형 병원에서 일하는
것, 그곳이 하와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클로워드라는 의사는 하와이에서
목 디스크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목 디스크 수술의 발전을 이룬 적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붙인 목 디스크 수술 방법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사는 사람들,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관광객들보다 하와이를 즐길 틈이 더 없지요. 마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남산 타워에 올라가 보거나 한강 유람선을 타 보기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영화 [디센던트]의 주인공 맷 킹(조지 클루니)은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하지만 겉보기만 그럴 듯하고, 실제로는 끔찍한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아내는 보트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이고, 말썽을 부리는 두 딸을 돌보는 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뇌사 상태로 악화되고, 아내가 사고 전에 바람을 피운 일을 알게 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게
되는, 영화 [디센던트]입니다.
조지
클루니의 열연은 제69회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게다가 2012년
아카데미의 남우주연상 주인공으로 점쳐지기도 했지요. 물론 영화 [아티스트]의 프랑스배우
장 뒤자르댕에게 그 영광이 돌아갔지만 모처럼 조지 클루니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디센던트]에서 맷 킹(조지 클루니)의 부인은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뇌사
상태에 빠지고 결국은 사망합니다. 생전에 환자는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인공호흡기
등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지 않겠다고 명시했다고 합니다. 존엄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의식 없는 상태를 이르는 식물인간, 그리고 뇌사라는 말도 헷갈리는데,
안락사니 존엄사니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먼저 식물인간과 뇌사의 차이를 알아보겠습니다. 식물인간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은 없지만 뇌간(대뇌와 척수를 연결하는 부위에 있는 구조물로 생명 유지, 즉
호흡이나 심장 박동 등을 조절하는 센터)의 기능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이나
심장의 기능은 유지되는 상황입니다. 의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눈을 뜨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의사소통은 되지 않지요. 그야말로 식물처럼 물과 적당한
양분을 주면 생명을 유지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드물게 locked-in syndrome 같이
완전히 무반응 상태이지만 의식은 남아있는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눈의 깜박임 등으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뇌사는 뇌간 기능까지 완전히 마비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공호흡기나
혈압 유지 약물 등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은 유지할 수 있지만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경우입니다. 뇌사는 의학적으로 사망한 경우로 장기 이식의 공여자 대상이 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뇌사의 경우에 안락사나 존엄사의 논란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의학적으로 사망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영화 [디센던트]에서 맷 킹의 아내는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뇌사라는 의학적인 사망의 상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서 생명 보조수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문제가 됩니다.
즉 호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 생명의 연장이 치료의 목적이라면 의미 없는
치료를 중단하기를 원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이 경우 의미 없는 치료를 적극적으로
중단하는 안락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장 박동을 멎게 하는 칼륨 등을 투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또 소극적인 안락사도 있습니다. 생명 연장에 필요한 것들, 즉 인공호흡기나
치료제 등을 중단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가 존엄사의 범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명제이며, 회피할 수
없지요.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우울해지고 염세적인 느낌입니다. 당연히 이것보다는 살면서 고민해야할 것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어쨌든 마지막까지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은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생의 마지막, 모두가 바라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고통 없는 죽음입니다. 평화로운 죽음,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마지막 삶의 페이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꿈꾸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