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부정, 처벌이 능사?
[칼럼] 손인규 기자
의대생들이 술렁이고 있다. 전국의과대학본과4학년협의회(전사협) 회장 등 10명이
의사 국가시험 실기문제를 유출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기 때문이다. 상당수 의대생들은
인터넷에서 실기시험 후기를 올린 것이 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의대생들은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이 “입건된
학생들이 기소유예 처분만 받아도 의사 자격을 주지 않겠다”고 밝히자 당황해하고
있다.
이 사건을 외형적으로만 놓고 보면 의대생들은 분명 잘못했다. 의대생들은 시험
전에 ‘문제 외부 유출 시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고 서약을 하고도 실기시험 문제를
공유하기 위한 별도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홈페이지에서 의대생들은 실기시험 당시의
구체적 상황과 평가기준까지 올려놓았다. 당연히 먼저 시험을 본 사람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상당수 언론들은 사설과 칼럼 등을 통해 준엄하게 의사들을 꾸짖고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의대생들의 평소 시험 특성과 실기시험의 본질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대생들은 평소 ‘쪽지 시험’과 ‘족보’ 위주로 공부를 한다. 실기시험도
선배나 동기의 경험담을 공유한다. 게다가 실기시험은 필기시험과 달리 문제와 평가기준을
안다고 점수가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는 법을
안다고 해서 면허증을 따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의사국시의 실기시험은 의대생이 12개 방을 돌아가면서 실시된다. 6개
방에서는 모의 환자들을 진단하고 6개 방에서는 채혈, 혈압 검사 등을 잘 하는지
체크한다. 문제 12항목은 문제은행에서 매일 다르게 선정된다고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 따르면 전체 112문항 가운데 103문항이 전사모 홈페이지에 유출됐다고
하지만 이 경험담을 본다고 성적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보건복지부도, 국시원도, 의료계도 사안을 가볍게 넘기고 싶어 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국시원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유출’이라고까지 부르는 데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한 의사고시 응시생은 “우리나라 어떤 시험이 시험 뒤에도 문제는 물론 정답을
일절 공개하지 않는 시험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기출 문제를 공부할 문제집도,
정답도 없는 마당에 인터넷을 통한 문제 유형의 공유는 자연스럽다는 주장이다.
의사고시는 의과대학 본과4년을 다 이수한 학생들이 치는 일종의 자격증 시험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2차 실기시험은 2009년에 처음 도입돼 올해까지 세 번 치른
시험이다. 그런데 41개 대학 의대 본과 4학년생들이 대부분 회원으로 가입한 '전국
의대4학년협의회(전사협)‘ 홈페이지가 올해 시험문제 내용을 후기 형식으로 올려놓고
공유했다. 서울지방검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누군가 제보를 해오자 수사에 나섰다.
경희대 의학전문대학원 의료윤리학과 박재현 교수는 “의대생들은 엄청난 분량의
의학 교재를 모두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필기시험도 선배들이 전해주는
기출문제를 모은 ‘족보’로 공부 해왔다”며 “이런 관행이 실기시험에서도 괜찮을
줄 알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 문제된 의대생들과 교수들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의식이 없이 불법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는 분위기다. 의대마다 수없이 치르는
자체 시험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연세대 의료법윤리학과 이일학 교수는 “어떤 분야든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의료인들 전체가 썩어 빠졌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의사가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서 비밀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부터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의대생은 차치하더라도 시험의 평가기준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의대
교수들은 공무집행방해죄의 법망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필자는 이번 사건은 의대 교육의 문제점과 정부의 안일함이 합쳐져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싶다.
이번 기회에 ‘쪽지 시험’ ‘족보’ 위주의 의대 시험관행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의대에 교양과 윤리를 근거로 통합적으로 사물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학부 과정에서 교양 위주로 공부한 의대 대학원생들이 필기시험 커닝은
물론 학기 중 과제물까지도 인용 문헌을 꼼꼼히 밝히지 않으면 표절에 해당돼 공부할
자격을 빼앗기도 한다. 그리고 이 원칙에는 예외가 없고 철저하다. 미국 동부의 명문
존스홉킨스 대학교 등 주요 대학은 '표절과 윤리' 과목을 이수해야 다른 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끔 학문세계의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일학 교수는 “미국 의사시험에도 참고 페이퍼가 있지만 문제 자체를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는다”며 “미국에서 시험의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는 강하게 처벌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허술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의사들 사이에서 윤리원칙이 의학의 중심에 오도록 교육의 축을 옮겨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전국 41개 의대에는 모두 의료윤리에 대한
과목이 필수적으로 개설되어 있다. 한 의료윤리학 교수는 “의학계도 교수나 학생들
모두 점점 교육과정에서 윤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며 “더디지만 점점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어떤 의대 학장은 예과부터 실습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예과부터 실습 위주로 가르치면 실무에 능한 ‘의료기능인’을 빠르게 길러내는
효과가 있겠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의사’는 육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시험을 관리한 국시원도 분명한 행보를 하지 않았다. 국가고시인
만큼 학생들에게 충분히 엄중함을 통보하고 보안을 강조했어야 했다.
특히 의사고시 실기시험은 고사장이 한곳밖에 없고 두 달 간이나 비슷한 형태로
시험이 계속되니 애초 문제유출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필리핀 의대 출신이
의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례용 실기시험이란 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국시원의 관계자는 형사사건이 되기 전 “실기시험 정보 공유가 점수와 합격률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상업적 이유가 아니라면 학생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느냐”고 말했다.
필자는 이번 사건의 학생들을 법적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제도를 개편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의대는 교육의 중심에 윤리와 가치, 통합적 사고와
문제해결능력을 위치시켜야 한다. ‘미래의 의사’들에게 원칙과 법, 윤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야 한다. 미국, EU, 호주 등에서는 의사 시험에서
환자에게 병 상태를 쉽게 설명해주는 방법 등이 아주 중요한데 이를 포함해서 의사
실기시험을 개편해야 한다. 정부는 의대생들의 환자를 위한 진정한 실력을 공평하고
투명하게 검증할 수 있도록 시험 방법을 개편해야 한다.
이번 의대생 실기시험 유출 사건은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몇몇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제도와 문화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의료 환경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삼으면 그 혜택은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