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한번쯤 괜찮겠지” 약 거르면···
치명적 결과…약 시간표 이용하면 도움
만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권 모씨(56)는 표적항암제 ‘글리벡’을 하루에 4알(400mg)씩
8개월 동안 먹었다. 주치의는 치료성적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권 씨는 의사의 말에
다 나은 줄 알고 임의로 약 복용량을 하루 2알(200mg)로 줄여서 5개월 동안 먹었다.
결국 글리벡에 내성이 생겨 2차 치료제인 ‘스프라이셀’로 바꿨지만 부작용이 심해
복용을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권 씨는 얼마 가지 않아 사망했다.
신장암이 폐로 전이돼 표적항암제 ‘수텐’을 복용하고 있던 박 모 씨(65). 약효는
있지만 피로감이 심하고 고통스러워 의사와 상의도 하지 않고 한 달 동안 약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폐에서 암세포가 재발했다. 결국 수텐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아 약효가
강한 표적항암제 ‘넥사바’로 바꿔야 했다. 넥사바는 지금은 일부 보험이 되지만
당시에는 보험이 되지 않아 한 달에 약 300만원 이상의 비용을 내야 했다. 박 씨는
결국 치료를 포기하고 사망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상임대표는 “환자들이 약 복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큰 고통을 겪고 세상을 떠난 사례들이 적지 않다”며 약 복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 씨와 박 씨의 공통점은 ‘중병 환자임에도 약을 잘 챙겨먹지 않았다’는 것.
의사가 처방하는 약만 잘 챙겨서 먹었더라도 죽음을 피하거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자,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오판으로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양의 약을 먹어야 한다는 원칙을 간과했다.
두 사람처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약을 챙겨먹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약만 먹으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지키지 못해 죽음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권 씨와
박 씨는 소중한 생명을 잃었지만 중병 환자는 의지력이 약해지거나 깜빡할 수도 있어
오히려 약을 잘 챙겨먹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가족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환자가 신경 쓰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가족이 인지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최악의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최근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IA)가 중병 환자를 대상으로
처방약 복용 실태에 대해 조사했더니 3명 가운데 1명이 약 복용을 한번 이상 중단했던
경험이 있었다.
중단 이유에 대해 44%가 ‘약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답했고 12.6%가 ‘가끔은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라고 응답했다. 절반이 넘는 사람이 약을 중단하는
이유가 부작용 등의 문제가 아니라 부주의나 잘못 판단해 내린 결정이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김동욱 교수는 “암 등 중병 환자는 누구보다
약을 성실히 먹어야 한다”며 “임의로 약 복용을 중단하거나 불규칙하게 약을 먹을
경우 치료 효과 저하는 물론이고 심각한 문제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약 복용 방법과 시간에 대한 안내는 의사나 약사의 역할이지만 약을 먹고 안 먹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한양대 류마티스병원 배상철 원장은 “환자가 집에서 시간을
지켜서 약을 먹도록 하기 위해 복용 시간표를 만들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라”고
조언했다. 약 복용 시간표는 환자가 약을 먹어야 할 시간과 약의 종류, 용량, 먹는
방법 등을 표로 만들어 정리한 것이다.
환자들이 제 때 약을 먹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관련 기술을 개발하거나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식경제부의 ‘차세대 IT기반 기술 사업화 기반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부터 대구와 대전 지역에서 시범서비스를 하고 있는 ‘약복용 도우미’
사업이다. 시범서비스 사업은 올해까지 진행된다. 스마트 약상자(사진)라고 불리는
약복용 도우미는 가로 25cm, 세로 15cm로 만들어진 것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되면 음성 안내와 함께 경보음이 울리며 구멍으로 약이 나온다. 집에 환자가 없을
때에는 문자서비스도 가능하다. 환자가 약을 먹지 않으면 주치의에게 정보가 전달된다.
스마트 약상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개발했고 SH제약이 기술이전을
받아 생산하고 있다. SH제약 관계자는 “약복용 도우미는 약 오남용을 막을 수도
있고 약국, 병원, 환자를 연결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며 “아직까지는 시범사업
중이기 때문에 언제 구체적으로 사용화 될지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사업이 끝나면
상용화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는 보건복지부 후원을 받아 ‘처방전대로
약 복용하기-락&약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두 기관은 △환자 대상 교육용
뉴스레터 발송 △전국 보건소, 노인복지회관, 주요 병의원에 홍보 포스터 배포 △병원별
교육간호사 대상 강의 진행 등을 전개할 예정이다.
안기종 대표는 “제 때 약을 챙겨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개발 등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약을 안 먹었기 때문에 생기는 최악의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