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시절 주치의가 본 DJ
“대통령이란 꿈 이룬 행복한 워커홀릭”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金大中, 85)이 18일 오후 1시43분에
서거했다. 지난달 13일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병세가 악화돼
수차례 생과 사의 고비를 넘겨왔으나 결국 생을 마감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만큼 투병도 길었던 김 전 대통령. 대통령 시절 당시 주치의가
되돌아 본 김 전 대통령 이야기를 들어봤다.
‘건강이상설’ 일축했던 ‘건강 이상무’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입은 상처뿐 아니라 당뇨, 고혈압 등 지병이
있어 주치의를 비롯한 측근들이 항상 긴장 상태였다. 게다가 대통령의 평균 연령보다
나이가 많아 그의 건강 상태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대선 후보 시절부터 건강과 관련한 음해성 루머가 나돌았다. ‘DJ의
건강 이상설’이 선거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선거운동으로 일정이 늘면서 김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때 ‘건강 이상무’를 발표해 ‘건강 이상설’을
잠재운 것이 바로 훗날 김 전 대통령 주치의가 된 연세대 의대 허갑범 교수(현 허내과의원
원장)다.
“건강관리 힘쓰는 모범생”
허갑범 원장은 대통령 재직 당시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사의 말을 평소에 잘
따라 건강관리에 힘쓰는 ‘모범생’이었고 큰 병치레를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건강관리 차원에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균형식을 주로 먹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청와대 내 수영장에서 일주일에 두번씩 수영을 하고 걸어다니는 습관으로 평소
운동을 대신했다. 영양 관리를 위해 종합비타민을 복용하기도 했다.
평소 김 전 대통령은 다리를 절뚝거리기도 했다. 1971년 5월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덤프트럭의 중앙선을 침범하는 의문의 고통사고를 당해 고관절 부상을 당한 후유증
때문이다.
허 원장은 “많이 걸으시면 사고를 당한 부위가 아파 잠시 쉬시기도 했지만 해외순방
때 그 많은 정상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5~7명 정도를 만날 정도로 단단한 체력을 보이신
분”이라며 “그에게 절뚝거리는 다리는 아무런 장애 요소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촘촘한 일정 속에서 시간을 쪼개 쓰고 틈만 나면 청와대에 따로
마련된 대통령 서재에서 마치 수험생처럼 공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허 원장은
“대통령이라는 꿈을 이뤘으니 즐겁게 일을 하셨다”며 “너무 과로하시지 않나하는
걱정이 들 정도의 행복한 워커홀릭이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주치의 시절을 되돌아보며 허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주치의로서 한
일은 건강 증진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질병 치료 차원이 아니라 예방이나 건강
증진에 중점을 두고 평소 식습관과 운동, 수면 등에 대해 조언하고 살폈다는 것이다.
“매사에 느긋하고 꼼꼼했던 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꼼꼼했던 분으로 꼽힌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펜을 들고 연설문 원고를 수정하고 수정하다 그 분량이 너무 많으면 아예
교정 수단으로 녹음테이프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치밀히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게 예의”라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메모도 습관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산책을 하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기록을 하곤 했다. 또 매일 신문을 챙기고 독서를 많이 했기 때문일까?
통계 수치나 자료를 이용하는 기억도 비상했고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신력은 그가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허 원장은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매사에 느긋하시고 꼼꼼한 분”이었다며
“정치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을 법도 한데 스스로 스트레스를 잘 조절하고
이겨냈었다”고 말했다.
신경이 예민하고 오늘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본래 잠을 잘 못자는 경향이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렇지도 않았다. 허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잠도 워낙 잘 주무셨다”며
“자질구레한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했다”고 말했다.
‘정치 구단’ 뒤에는 남다른 배려심 있었다
“정치 구단이다” “김대중교다”라는 말은 김 전 대통령의 정치력이 뛰어났다는
점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 전 대통령이 사람을
끄는 흡입력 뒤에는 상대방에 대한 남다른 배려가 있었다고 허 원장은 말했다.
허 원장은 “남의 말을 많이 듣고 남을 배려하는 부드러움이 대단했고 재치도
상당했다”며 “그 분과 함께 했던 여름휴가에서 많은 걸 느꼈고 그 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