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호흡기 너무 성급하게 뗐나”

“인공호흡기 떼도 숨 거두지 않을 가능성 생각했어야” 지적

[존엄사]“호흡기 너무 성급하게 뗐나”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허용한 대법원 판결에 따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김 모

할머니(77)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으나 이내 사망할 것이라는 당초 예측과는 달리

환자가 자발호흡을 하고 있어 애초에 존엄사 대상이 아니지 않았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 할머니는 호흡기가 23일 오전 10시22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본관 15층 1인

병실에서 제거됐음에도 불구하고 13시간여가 지난 23일 밤 12시가 되도록 자발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의료진은 “혈압과 맥박도 정상”이라며 “호흡기 감염이나 욕창

같은 합병증만 없다면 3개월 이상 생존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창일 연세 의료원장은 “대법원의 판결 근거가 됐던 ‘사망 임박 상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며 “존엄사는 억제돼야 한다”는 병원의 공식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앞서 병원 측은 3단계로 나눈 존엄사 기준을 마련해 발표했다. 회생 불가능한

사망 임박 단계인 1단계, 인공호흡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2단계, 자발 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3단계였다. 병원 측은 “단계가 올라갈수록 존엄사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할머니의 상태가 인공호흡기를 떼면 바로 1단계로 접어들어 숨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재 할머니는 오히려 자발 호흡을 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3단계로

나아질 가능성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5월 환자 가족은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면서 인공호흡기 제거, 약물치료

중단, 영양공급 중단, 수분 공급 중단의 4가지를 요구했지만, 대법원은 인공호흡기만

떼라고 판결을 내려 병원 측은 다른 생명연장 조치를 계속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김 할머니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미국 퀸란 케이스, 호흡기 떼어 낸 뒤 9년 생존

세계적으로 존엄사 논쟁을 일으켰던 1975년 미국 뉴저지 주의 ‘퀸란 사건’의

경우도 식물인간 상태인 21세 여성 퀸란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9년 남짓

스스로 호흡을 하며 생존하다가 1985년 6월 폐렴으로 사망한 케이스다.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인문사회의학교실 구영모 교수는 “1970-80년대 퀸란도

9년 가까이 생존하다가 숨졌는데 의학이 그때보다 훨씬 발달한 현재 뇌간 기능이

살아 있는 할머니가 뇌사 상태가 아닌 식물인간 상태이기 때문에 물과 영양공급만

제대로 해 준다면 퀸란보다 더 오래 생존할 가능성도 있다”며 “의료적 평가가 애초에

정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법원이 제시한 존엄사의 전제 조건은 “환자가 의식 회복 가능성이 없고, 자발

호흡 같은 생체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짧은 시간 안에 사망에 이르는 게  명백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원의 이러한 판단 근거는 김 할머니를 제3자 입장에서

진단한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의 ‘치료가 계속되더라도 회복 가능성이

없고 치료 역시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이런 의학적

판단에 문제가 제기될 전망이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이 존엄사라고 본 법원의 판단이 잘못 됐다는 의견도 있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기획실장은 “법원은 존엄사를 허용하면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인공호흡기를 떼라고 했다”며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

법원의 판결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직 존엄사를 수용할 여건이

갖춰 있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아직 존엄사에 대한 준비 안 돼 있다”

윤 실장은 “존엄사의 한쪽 면만 보고 인공호흡기를 뗀 뒤 사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 문제”라며 “존엄사에는 치료 중단

뿐 아니라 품위 있는 죽음, 죽음에 이르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 경제적 부담, 환자의

가족을 위한 처우 등이 모두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할머니가 스스로 호흡을 하고 있다고 해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시킨 결정이 그릇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허대석 원장(서울대병원 내과 교수)은 “불확실성이 있는

의학의 특성상 인공호흡기를 뗀 직후 환자가 바로 사망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회복 가능성이 없는데 자발호흡을 하고 있다고 해서 환자가 받고 있는 고통을 덜어

주라는 판결이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김 할머니가 자발호흡을 하면서 병원과 가족, 법원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소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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